유치원생 영어로 맨땅에 헤딩…드림웍스 뚫은 토종 디자이너

중앙일보

입력 2021.09.20 14:00

업데이트 2021.09.20 15:16

지난 2일부터 미국 전역에서 방영중인 트롤스토피아(Trollstopia) 시즌4. (트레일러 일부 캡쳐) 사진 드림웍스

지난 2일부터 미국 전역에서 방영중인 트롤스토피아(Trollstopia) 시즌4. (트레일러 일부 캡쳐) 사진 드림웍스

“‘나 트롤 그려요’ 하면 다 알아들을 정도로 유명한 시리즈를 직접 만드는 건데, 너무 설렜죠”

최지영(30)씨는 올해 7월 미국 애니메이션 회사 ‘드림웍스’의 정식 디자이너가 됐다. 지난 3월부터 계약직으로 그리던 '트롤스토피아(Trollstopia)'를 7월부터는 정규직 신분으로 그린다. 최씨는 “거의 독학한 애니메이션으로 꿈을 이뤘다”고 했다.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취업기를 전화 인터뷰를 통해 들었다.

드림웍스 한국인 디자이너 최지영씨. 왼쪽은 대학생이던 2019년 드림웍스 캠퍼스에 투어를 갔을 때, 오른쪽은 2021년 입사 후 노트북 수령을 위해 딱 한 번 드림웍스 캠퍼스를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사진 최지영씨

드림웍스 한국인 디자이너 최지영씨. 왼쪽은 대학생이던 2019년 드림웍스 캠퍼스에 투어를 갔을 때, 오른쪽은 2021년 입사 후 노트북 수령을 위해 딱 한 번 드림웍스 캠퍼스를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사진 최지영씨

드림웍스는 '슈렉' '마다가스카' '쿵푸팬더' 등을 만든 회사다. 2020년부터 방영된 ‘트롤스토피아’는 2016년 개봉한 영화 '트롤(Trolls)'의 인기에 힘입어 만들어진 TV 시리즈로, 최씨가 작업한 시즌4는 지난 9월 2일부터 미국 전역에서 방영 중이다.

최씨는 올해 3월 계약직 디자이너로 드림웍스와 첫 인연을 맺었고, 올해 초 드림웍스 ‘수습직원(Trainee)’ 프로그램 채용공고가 떠서 별 기대 없이 원서를 넣은 게 합격으로 이어졌다. 미국 전역에서 올해 단 3명 뽑은 정규직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인크레더블’ 부록 보고 꾼 꿈… 24살 무작정 미국행

최씨의 포트폴리오 일부. 빛을 고려해 색을 여러가지로 표현하는 포트폴리오를 구상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한 화면을 지배하는 '색채'가 분위기를 좌우한다. 사진 최지영씨 제공

최씨의 포트폴리오 일부. 빛을 고려해 색을 여러가지로 표현하는 포트폴리오를 구상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한 화면을 지배하는 '색채'가 분위기를 좌우한다. 사진 최지영씨 제공

최씨가 맡게된 ‘시각 개발 디자이너(visual development artist)’는 애니메이션 화면의 구도와 분위기, 색채 등 전반적인 이미지에 관한 사항을 모두 결정하는 ‘무대 디자이너’ 격이다. 최씨는 “애니메이션에서 ‘색채’를 상징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아서, 색과 빛감으로 분위기를 살리는 게 핵심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미술을 시작한 그는 “사실 픽사 ‘인크레더블’ DVD 부록에 실린 ‘인크레더블을 만드는 과정(How to make The Incredibles)’ 영상을 보고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꿨지만, 그때는 영어도 못하고, 컴퓨터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어려운데 내가 저런 회사에서 그림을 그리겠어‘ 하면서 접었다”고 말했다.

최씨가 일러스트 작업을 한 동화책 'The Efil Brothers'가 2017년 전미 독립출판상 어린이 도서 분야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진 최지영씨 제공

최씨가 일러스트 작업을 한 동화책 'The Efil Brothers'가 2017년 전미 독립출판상 어린이 도서 분야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진 최지영씨 제공

동덕여대 서양화과 졸업 후 ’알기 쉬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미국 유학을 택했다. “24살에 미국 유치원생보다 영어를 못하는 상태로 커뮤니티 컬리지(지역 대학)에서 16~18살 애들이랑 학교 다닐 때가 제일 힘들었다”는 말처럼, 유학생활 6년 중 첫 5년은 대부분 미국에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디즈니에서 일했던 교수님을 통해 캐릭터 디자이너 일도 하고, 미국 어린이들에게 그림도 가르치고, 학교에서 애니메이션 클럽도 운영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포트폴리오를 쌓았다. 최씨가 일러스트 작업을 한 동화책 'The Efil Brothers'는 2017년 전미 독립출판상 어린이 도서 분야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포토샵과 3D 프로그램은 독학으로 익혔다.

맨땅에 헤딩하기, ‘코시국’이 오히려 도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토대로 작업한 최씨의 포트폴리오 일부. 최씨는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포트폴리오가 풍성해졌고, 각종 채용과 취업박람회가 온라인으로 열리면서 더 많은 곳에 그림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했다. 사진 최지영씨 제공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토대로 작업한 최씨의 포트폴리오 일부. 최씨는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포트폴리오가 풍성해졌고, 각종 채용과 취업박람회가 온라인으로 열리면서 더 많은 곳에 그림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했다. 사진 최지영씨 제공

‘애니메이션’ 하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디즈니, 픽사 등 다른 스튜디오도 많지만 최씨는 드림웍스를 집중 공략했다. “스튜디오마다 그림의 느낌이 다른데 드림웍스가 전반적인 느낌이 맞아보였고, 직원 중 외국인 비율이 높은 회사여서 가능성이 커보였다”는 이유에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해마다 열리는 직업박람회와 채용설명회가 모두 온라인으로 진행된 것이 최씨에겐 호재였다. 몇 시간 걸려 찾아가야할 박람회 대신 집에서 온라인으로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채용공고에 접근할 수 있었고, 각종 온라인 강의도 폭넓게 열렸다. 지난해 9월 드림웍스와 처음 연이 이어진 것도 온라인으로 열린 박람회(Lightbox Expo)에 올린 포트폴리오 덕이었다. 처음에는 그림 다섯장, 그 다음에는 한 화 전체를 맡고, 계약 연장을 거듭하며 올해 상반기 '트롤스토피아' 작업이 이어졌다.

최씨의 포트폴리오 일부. 최씨가 합격한 'visual devolopment artist'는 애니메이션 화면 안의 공간을 디자인하고, 어떤 각도에서 공간을 비출지 등 모든 것을 구상하는 역할을 한다. 사진 최지영씨 제공

최씨의 포트폴리오 일부. 최씨가 합격한 'visual devolopment artist'는 애니메이션 화면 안의 공간을 디자인하고, 어떤 각도에서 공간을 비출지 등 모든 것을 구상하는 역할을 한다. 사진 최지영씨 제공

최씨는 “회사마다 원하는 스타일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림만 잘 그린다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회사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들어갈 수 있다”며 “디렉터들은 ‘만화를 잘 그리는지’ 보는 게 아니라 기본기와 창의성, 느낌을 보더라”고 전했다. 그가 서양화를 공부하며 익혔던 색채와 빛 감각, 미국 대학에서 교수에게 배운 ‘투시’ 기법 등 기본기가 드림웍스에서 중요하게 보는 요소였던 점도 그에게 유리했다.

'꿈의 직장' 하루 일과는 '6시 기상, 12시간 그림' 

정식 직원이 됐지만, 최씨는 코로나19로 내내 재택근무만 하느라 정작 로스앤젤레스 드림웍스 본사에는 “노트북을 받으러 갈 때 딱 한번밖에 못 가봤다”고 했다. 7월 입사 후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아 '트롤' 시즌4 작업을 끝낸 후 9월 현재는 두 번째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그의 일과는 규칙적이고 단순하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하루 10~12시간 방에 앉아서 그림만 그린다. “그림을 더 잘, 오래 그리기 위해서 운동을 꼭 한다”고 할 정도로 그의 모든 것은 ‘그림’에 맞춰져있다. 최씨는 “취직한 친구들이 힐 신고 백 메고 다니는데 나는 백팩에 청바지 입고 그림 그리고 있을때, 불투명한 미래가 막막해 맨날 울면서 자기도 했다"며 "지금도 새로운 프로젝트에 매 번 도전해야하는 경쟁 속이지만, 원하는 그림을 그려서 행복하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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