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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합병 재미봤는데 벨라루스도 삼키나, 푸틴 앞 뜻밖 천운 [알지RG]

중앙일보

입력 2021.09.20 05:00

업데이트 2021.09.20 23:02

※ '알지RG'는 '알차고 지혜롭게 담아낸 진짜 국제뉴스(Real Global news)'라는 의미를 담은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지난 9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지난 20여년 간 사실상 진행이 멈춰 있던 연합국가(Union State) 창설 논의의 본격적 재개를 알렸다.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지난 5월 29일(현지시간) 정상회담을 마치고 흑해 연안에서 함께 요트를 타고 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지난 5월 29일(현지시간) 정상회담을 마치고 흑해 연안에서 함께 요트를 타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날 양국이 합의한 것은 우선 경제 공동체로의 통합을 위한 로드맵이었다. 28가지 선결 사항이 모두 공개되진 않았지만, 4시간에 걸친 회담에선 무역·노동·통화·세금·에너지 등이 광범위하게 논의됐다.

푸틴 대통령은 회담 직후 “양국 공통의 금융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단일한 산업·농업 정책을 가동해 경제적 공동체를 먼저 추진한다”며 “모든 28개 프로그램이 조율됐다”고 말했다. 이에 루카셴코 대통령도 “우리가 함께 가야 더 선진화된 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며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9일(현지 시간) 모스크바에서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양국이 연합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28개 로드맵을 확정했다. [EPA=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9일(현지 시간) 모스크바에서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양국이 연합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28개 로드맵을 확정했다. [EPA=연합뉴스]

이번 회동에 대해 뉴욕타임스(NYT)는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두 정상은 6차례 만남을 통해 경제적 유대 관계를 증진시켰고, 이제 어려운 정치적 문제만을 남겨뒀다”고 평가했다. 독일 공영방송인 도이치벨레(DW)도 “루카셴코 대통령이 지도자로 남을지, 벨라루스가 그 이름을 유지할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러시아는 벨라루스를 흡수한다는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고 전했다.

“루카셴코가 권력 유지를 위해 그동안 뒷배가 되어준 푸틴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된 것이 통합 논의를 앞당긴 요인.”(워싱턴포스트)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며 지난 1994년부터 27년째 정권을 유지해온 루카셴코 대통령이 처음부터 국가 통합 요구에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구 약 1억4500만 명인 러시아에 비해 벨라루스의 인구는 950만 수준으로, 겉으로는 국가 통합이지만 실제로는 러시아가 벨라루스를 흡수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에 루카셴코 대통령은 지난 1999년 러시아와 연합국가를 지향한다는 조약을 체결한 이후 싼 가격에 원유와 천연가스 등을 공급받으며 밀착했지만, 실질적인 통합 논의는 뒤로 미뤄왔다. 특히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에는 유럽연합(EU)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며 줄타기 외교를 본격화했다.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 지난 2019년 12월 시위대가 푸틴과 루카셴코 대통령의 정상회담에 반대하며 ″이것은 통합이 아니라 점령″이라고 외치며 도심을 행진하고 있다. [AP=뉴시스]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 지난 2019년 12월 시위대가 푸틴과 루카셴코 대통령의 정상회담에 반대하며 ″이것은 통합이 아니라 점령″이라고 외치며 도심을 행진하고 있다. [AP=뉴시스]

이에 대해 NYT는 “루카셴코는 러시아와의 정치적 통합을 질질 끄는(dragged his feet) 방법으로 유럽과 러시아 양쪽에서 이득을 취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2019년 3월엔 “벨라루스 국민들은 러시아와 같이 있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사는 것을 원한다”며 양국의 통합 가능성을 일축하기도 했다.

지지부진하던 상황 뒤집은 ‘부정선거 논란’

지난해 8월 열린 대선 결과에 항의 중인 벨라루스 시위대. [EPA=연합뉴스]

지난해 8월 열린 대선 결과에 항의 중인 벨라루스 시위대. [EPA=연합뉴스]

이런 상황이 바뀐 건 지난해 8월 대선 부정선거 의혹에서 비롯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사그라들지 않으면서다.

그는 당시 약 80%의 득표율로 6선에 성공하며 집권을 이어갔지만, 선거 결과에 대해 BBC 방송은 “이는 현지 여론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전했다. 베를린 동유럽국제문제연구소가 지난 3월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인 스베틀라나 티카놉스카야를 뽑았다는 응답이 53%였던 반면, 루카셴코에 투표했다는 응답은 19%에 불과했다.

선거 직후 20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광범위한 부정선거가 이뤄졌다”고 항의했고, 이에 시위 참가자 중 3만5000명이 구금되고 야권 지도자 중 일부는 실종되거나 국외로 추방됐다.

비상식적 탄압으로 서구와 결별

벨라루스 민스크 공항의 탐지견과 대원들이 지난 5월 23일(현지시간) 리투아니아 빌누스로 향하다 비상착륙한 라이언에어의 수하물을 검색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벨라루스 민스크 공항의 탐지견과 대원들이 지난 5월 23일(현지시간) 리투아니아 빌누스로 향하다 비상착륙한 라이언에어의 수하물을 검색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후 루카셴코 대통령은 상식을 벗어난 탄압을 펼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야권 인사 체포를 위해 아일랜드 항공사 라이언에어의 여객기를 강제 착륙시켰다. 이어 6월엔 야권 운동가 스테판 라티포브가 법정에서 “내가 유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내 가족과 이웃에게 형사소송을 제기한다고 했다”며 펜을 자신의 목에 찌르다가 구급차에 실려 갔다.

이는 EU와 미국 등 서방 세계의 대규모 경제 제재를 불렀고, 루카셴코 대통령은 “코로나는 사우나를 하고 보드카를 마시면 낫는다”고 망언을 하는 등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 대한 대처에도 실패하며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이에 그는 지난달 9일 “차기 대통령 선거에 직접 출마하지 않고 머지않은 시기에 떠날 것이다. 누군가를 내세워 밀지도 않겠다”며 내년 초 개헌을 위한 국민 투표 이후 퇴임을 시사하는 등 급박한 민심 달래기에 나선 상황이다.

벨라루스 반체제 인사 스테판 라티포브가 지난 6월 1일(현지시간) 민스크 법정에서 자해를 시도한 뒤 피를 흘리며 구급차에 실리고 있다. 민스크=AP연합뉴스

벨라루스 반체제 인사 스테판 라티포브가 지난 6월 1일(현지시간) 민스크 법정에서 자해를 시도한 뒤 피를 흘리며 구급차에 실리고 있다. 민스크=AP연합뉴스

이에 대해 NYT는 “루카셴코 대통령이 정치적 생존을 위해 거의 전적으로 크렘린궁에 의지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크림합병으로 지지율 끌어올린 푸틴의 ‘소련 향수’ 공식

지난 2018년 3월 14일(현지시간) 대선을 나흘 앞두고 크림반도를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나히모프 광장에서 열린 크림반도 합병 행사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지난 2018년 3월 14일(현지시간) 대선을 나흘 앞두고 크림반도를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나히모프 광장에서 열린 크림반도 합병 행사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문제는 러시아 입장에서도 루카셴코 대통령이 권력을 잃을 경우 러시아도 동유럽의 지정학적 요충지를 잃고, 반러시아 국가들로 둘러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9일 푸틴 대통령이 루카셴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직후 첫 행보는 대규모 군사 훈련이었다. 13일 4년에 한 번 열리는 대규모 군사 훈련인 ‘자파드(Zapad)-2021’이 실시됐다. 자파드는 러시아말로 ‘서쪽’을 뜻한다. 러시아 당국 발표에 따르면 이번 훈련에는 20만의 병력과 80대 이상의 항공기, 290대의 탱크와 240문의 포, 다연장 로켓시스템과 15척의 함정 등 760대 이상의 군사장비가 동원됐다.

러시아-유럽 잇는 가스관 루트.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러시아-유럽 잇는 가스관 루트.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또 17일부터 사흘간 이어진 러시아 총선을 앞두고 국면 전환의 계기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9일 영국 일간 가디언은 “푸틴 대통령을 지지해 온 통합러시아당의 최근 지지율이 2008년 이후 최저치인 26%로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지난 2016년 총선 당시 80%대를 유지했던 푸틴 대통령 자신의 지지율도 지난달 기준 61%대까지 내려왔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푸틴 대통령은 지난 2014년 크림반도의 합병 이후 얼마나 자신의 인기가 치솟았는지 기억하고 있다”고 전했다.

합병 형태 고심 중인 러시아

다만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국가연합 형태에 대해선 완전한 합병은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러시아가 벨라루스를 흡수 통합할 경우 러시아와 유럽 사이의 완충지대가 사라짐과 동시에 양국의 국력 차이에서 오는 정치적·경제적 비용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는 중앙일보와 전화통화에서 “러시아 입장에서 국경선 방어 부담이 올라가고, 서구 사회를 지나치게 자극하게 되는 완전한 결합을 생각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며 “느슨한 연방 정도의 형태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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