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 채찍’이자 ‘식량 나오는 곳간’…北에 유엔은 이중적 존재 [유엔 가입 30년 ⑤-끝]

중앙일보

입력 2021.09.18 05:00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유엔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94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 결의 195호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인정받았다. 유엔군의 6ㆍ25 전쟁 파병 근거가 된 건 1950년 6월 27일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83호였다.

하지만 유엔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쉽게 품지 않는 엄한 부모 같았다. 미국과 옛 소련의 대립구도로 수십년 간 한국의 유엔 가입은 좌절됐고, 냉전이 끝난 뒤인 1991년에야 유엔에 입성했다. 이후 유엔 사무총장 배출, 두 차례의 안보리 비 상임이사국 수임 등 한국은 ‘준비된 회원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중앙일보는 한국의 유엔 가입 30주년을 맞아 한국 ‘유엔 외교’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본다. 

⑤-끝, 천덕꾸러기? 아픈 손가락? 북한과 유엔 

남북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한지 올해로 30년째다. 한국은 그간 국제 질서에 잘 적응한 ‘모범 국가’이자 ‘유엔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됐다면, 북한은 핵ㆍ미사일 개발과 인권 상황 등으로 제재와 비판을 받기 일쑤인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이 유엔에서 공개적인 지적을 받을 때마다 유엔 주재 북한 대사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모습이 언론에 심심치 않게 포착되곤 한다.

북한의 눈에 비친 유엔은 강대국의 논리에 따라 거수기 역할만 하는 ‘그들만의 리그’인 동시에, 약소국도 강대국과 동등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 애증 섞인 북한의 30년 대유엔 외교를 살펴봤다.

김성 유엔 주재 북한대사가 지난해 9월 29일(현지시간) 제75차 유엔 총회에서 기조 연설하는 모습. 제공 유엔.

김성 유엔 주재 북한대사가 지난해 9월 29일(현지시간) 제75차 유엔 총회에서 기조 연설하는 모습. 제공 유엔.

야심차게 가입 뒤 제재 포화만

 세계에 큰 나라, 작은 나라는 있지만, 주요국과 비주류국이 따로 있진 않습니다. 잘 사는 나라, 못 사는 나라는 있지만, 어느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위에 군림해선 안 됩니다.

1991년 유엔 가입 당시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은 “북한은 유엔 헌장의 목적과 원칙에 충실히 임하고, 유엔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정당한 기여를 하겠다”며 이처럼 다짐했다.

그랬던 북한이 유엔의 정신을 어기는 데는 채 2년도 걸리지 않았다. 1993년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고, 이를 계기로 최초의 북핵 관련 대북 결의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채택됐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고 1차 핵실험을 강행한 2006년부터는 대북 제재가 본격화했다. 지금까지 유엔 안보리에서 나온 대북 제재 결의는 10개에 이른다.

북한은 유엔의 제재에 대해 “불공평한 국제질서가 낳은 부당한 압력”이라며 반발해왔다. 지난 2019년 10월 김영철 당시 북한 아태평화위원장은(현 통일전선부장)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 유엔 제재 결의 이행을 집요하게 강박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이후에도 북한은 꾸준히 “유엔이라는 것이 미국이 손을 들라고 하면 들고 내리라고 하면 내리는 허재비(허수아비)로 완전히 전락했다”(2019년 11월 외무성 대변인), “신성한 유엔은 특정세력들을 대변하는 어용창구가 아니다”(지난해 6월 외무성 대변인)라고 반발했다.

2006년 7월 15일(현지시간) 유엔 안보리가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2호 발사를 규탄하며 결의 1695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모습. 결의 1695호는 회원국에게 미사일 관련 물자를 제공하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지만 사실상 권고에 그쳐 실질적인 '제재 결의'로는 분류하지 않는다. 제공 유엔.

2006년 7월 15일(현지시간) 유엔 안보리가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2호 발사를 규탄하며 결의 1695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모습. 결의 1695호는 회원국에게 미사일 관련 물자를 제공하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지만 사실상 권고에 그쳐 실질적인 '제재 결의'로는 분류하지 않는다. 제공 유엔.

“인권은 해볼만” 사활 건 北

핵ㆍ미사일은 북한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인권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고 해볼만 하죠.

2019년 가족과 함께 탈북한 류현우(한국명)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북한의 대유엔 외교의 키워드로 인권을 꼽았다.
류 전 대사대리는 노동당 자금 관리를 맡았던 ‘김정일의 금고지기’ 전일춘의 사위로, 지난 1월 탈북 사실이 알려진 뒤 태영호, 조성길 등에 이은 고위 외교관의 탈북으로 주목받았다.

류현우(한국명)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 지난 1월 CNN 인터뷰 당시 사진. CNN 캡처.

류현우(한국명)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 지난 1월 CNN 인터뷰 당시 사진. CNN 캡처.

류 전 대사대리는 “북한 외무성에도 한국 외교부와 같이 국제기구국을 두고, 산하 7개 과 중 1과가 유엔을 담당한다”며 “북한은 핵ㆍ미사일 문제와 인권 문제라는 양대산맥으로 국제적 압력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북한 지도부는 유엔에서 북한 인권 문제가 유엔에서 의제화하는 걸 막는 데 필사적이었다고 한다. 류 전 대사대리는 “핵ㆍ미사일 개발 문제는 외교관들조차 (국제사회에서)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지만, 인권 문제는 중국, 러시아 등 나라마다 특수성을 내세우며 ‘우리식 인권’을 강조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북한 입장에서 인권은 다퉈볼만한 문제”라는 설명이다.

그는 이어 “북한 지도부는 국제사회의 인권 지적을 용인하는 순간 체제가 물 먹은 담벽처럼 와르르 무너진다고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올해까지 19년 연속으로 채택된 북한 인권결의안과 관련해서도 “결의안에 대한 반대 표를 얼마나 모을 수 있느냐에 따라 해외 공관에 나가 있는 외교관들의 한 해 성과가 사실상 판가름난다”고도 덧붙였다.

정권 차원에서 주민들에 반인도범죄에 해당하는 인권 유린을 자행한다는 비판을 받는 북한이지만, 의외로 인권 관련 국제 규약은 상당수 비준했다. 북한은 세계인권선언에 법적 구속력을 불어넣은 ‘사회권 규약’과 ‘자유권 규약’의 당사국이며, 아동ㆍ여성ㆍ장애인 관련 협약도 차례로 비준했다.

통일연구원이 발간한 '2021 북한인권백서'에 정리된 북한의 국제인권조약 비준ㆍ가입 현황. 백서 캡처.

통일연구원이 발간한 '2021 북한인권백서'에 정리된 북한의 국제인권조약 비준ㆍ가입 현황. 백서 캡처.

다만 북한은 당사국으로서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보고서 제출을 건너뛰고, 관련 기구의 인권 지적에 제대로 해명하지 않는 등 당사국이라는 ‘타이틀’만 누릴 뿐 협약 이행의 의무를 다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류 전 대사대리는 북한이 내부적으로 나름대로 국제사회의 인권압박에 대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6년부터 김정일의 친필 지시로 국제기구국 내 인권 문제를 전담하는 전문 부서가 생겼고, 2015년부터 김정은의 지시로 외무성 인권담당 순회대사직도 새로 나왔다”고 말했다.

실제로 북한은 강제실종 문제 등에 대한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들의 서한에 대해 지난해까지만 해도 일부 답장을 보내며 해명에 나서기도 했다.

경제 지원 확보 총력…첫 SDG 보고서도

북한과 유엔의 관계에서 인도주의 지원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1995년 8월 대홍수를 계기로 유엔에 공식적으로 지원을 요청한 이래로 북한은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 식량농업기구(FAO), 유엔아동기금(UNICEF) 등을 통한 구호 지원을 꾸준히 받았다.

류 전 대사대리는 “평양 대동강구역 외교단촌에 유엔 산하 국제기구 대표부들이 상주해있는데, 외무성 국제기구국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이들과의 사업”이라고 말했다. “북한 내부 사정을 필사적으로 전달해 더 많은 국제사회의 지원을 끌어오려 한다”는 설명이다.

지난 2019년 4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 공동조사단이 북한 황해북도에서 현지 조사를 벌이는 모습. FAO, WFP, 연합뉴스.

지난 2019년 4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 공동조사단이 북한 황해북도에서 현지 조사를 벌이는 모습. FAO, WFP, 연합뉴스.

북한이 지난 7월 유엔에 최초로 제출한 ‘자발적 국가별 검토’(VNR) 보고서도 주목받고 있다. 유엔이 추진하는 ’지속가능 발전 목표‘, 흔히 SDG라고 불리는 목표 달성을 위한 북한의 노력을 정리한 문건이다.

북한은 63쪽 분량의 보고서를 쓰기 위해 지난 2018년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이 주관하는 태스크포스(TF)까지 만들어 준비했다. 보고서에서 북한은 최근 자국의 경제 상황을 상세히 공개하며, 에너지와 보건 분야의 열악한 상황을 인정했다.

다만 북한은 유엔의 SDG 개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았다는 분석이다. 최규빈 통일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난 7월 보고서에서 “북한은 유엔의 SDGs를 자국의 경제발전 5개년 계획에 접목해 사실상 ‘우리식 SDGs’로 전략화했다”고 분석했다. 최 연구위원은 지난 16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유엔의 SDGs는 모든 국가가 일률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강제사항은 아니기에 북한이 내부 상황과 정책목표를 고려하여 변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지난 7월 유엔에 제출한 '자발적 국가별 검토'(VNR) 보고서 표지 캡처.

북한이 지난 7월 유엔에 제출한 '자발적 국가별 검토'(VNR) 보고서 표지 캡처.

북한에게 유엔은?

북한에 유엔은 체제 정당화를 위한 선전 활동의 무대이기도 하다. 북한은 유엔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주장하지만, 선진국과 개도국을 가리지 않고 동등하게 한표씩 보유하는 유엔의 원칙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북한은 아직 외교 관계를 맺지 않은 미국 등 미수교국과 물밑 접촉할 수 있는 창구도 유엔을 통해 확보하고 있다. 미국 뉴욕 한복판에 위치한 주유엔 북한 대표부와 미 국무부를 잇는 소위 ‘뉴욕 채널’이다. 북한은 뉴욕 채널을 통해 북ㆍ미 물밑 교섭을 할 뿐 아니라, 주요 인사의 방미도 조율한다.

주영 북한 공사 출신의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북한에게 유엔은 핵, 인권 등을 문제삼는 껄끄러운 대상인 동시에, 식량, 보건 등에서 많은 혜택을 주는 이중적 존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초국가적 기구로서 전 세계 평화와 안정을 다뤄야하는 유엔이 여전히 특정 대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향은 북한만의 불만이 아니라 인류가 풀 숙제이기도 하다”는 문제 의식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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