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 “미국, 중공 승인한 적 없다” 장제스 앞세워 압박

중앙선데이

입력 2021.09.1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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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4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94〉 

중공도 미국과 인연이 많았다. 1946년 1월 군사조사처 미군동료에게 휘호를 선물하는 중공대표 예젠잉(葉劍英). [사진 김명호]

중공도 미국과 인연이 많았다. 1946년 1월 군사조사처 미군동료에게 휘호를 선물하는 중공대표 예젠잉(葉劍英). [사진 김명호]

1945년 2월 얄타에서 만난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전후 중국 문제에 죽이 맞았다. 태평양전쟁 기간 일본에 점령당했던 홍콩을 되돌려 받기로 한 처칠은 토를 달지 않았다. 2개월 후 미국의 신임 주중대사 패트릭 헐리가 대중국정책을 발표했다. “미국은 중국공산당을 승인한 적이 없다”며 중공을 지원할 의향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대다수의 미국인의 눈에 비친 중공은 소련공산당에 비해 호의적이었다.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다.

미 해병대 5만 명, 국민당 군대 지원

베이징대학과 옌칭대학 학생회가 주도한 반미시위. [사진 김명호]

베이징대학과 옌칭대학 학생회가 주도한 반미시위. [사진 김명호]

미국의 중공 압박은 계속됐다. 같은 해 6월,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재촉했다. “소련과 우호조약을 서둘러라.” 2개월 후 〈중소우호동맹조약〉 체결을 성사시켰다. 일본 패망 직전 동북에 진입해 일본 관동군의 무장을 해제시킨 소련군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미국은 국민당이 선포한 중공 직할부대 8로군과 신4군의 “일본군 무장해제 금지령”도 지지했다. 이어서 수송기와 군을 동원해 국민당 정예 40여 만명과 미 해병대 5만 명을 북방의 전략 요지에 배치했다. 국민당은 일본군 120만 명이 사용하던 장비와 물자도 손에 넣었다. 미국의 지원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전투기 1000대와 대포 7000문 외에 인도와 태평양 17개 도서(島嶼)에 방치해 둔, 원가 9억 달러에 해당하는 전시 잉여물자를 헐값으로 국민당 정부에 팔았다.

미국의 구상은 장제스를 핵심으로 한 친미반소(親美反蘇) 정권의 수립이었다. 중공과의 대화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무력충돌이 임박하자 국·공 양당과 오가기 수월한 스튜어트를 중국대사에 임명했다. 1946년 6월, 국·공내전의 막이 올랐다. 장제스는 승리를 장담했다. “8개월, 늦어도 10개월이면 공산 비적 소멸이 가능하다.” 트루먼의 특사 마셜이 장에게 건의했다. “작전지역이 너무 넓다. 군사력에만 의존하면 재력(財力)이 고갈된다. 재정이 붕괴되면 공산당의 천하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다. 한동안만이라도 중공과 합작해라.” 장은 마셜의 충고를 내정간섭으로 간주했다. 한 귀로 흘렸다. 국민당 군은 거침이 없었다. 10개월 만에 하얼빈(哈爾賓)을 제외한 동북의 도시들을 탈환하고, 장수(江蘇)성 이북의 성(城)과 진(鎭)을 수복했다. 중공중앙 근거지 옌안(延安)에도 청천백일기를 게양했다. 중공도 팔짱만 끼고 있지 않았다. 도시를 포기하고 농촌으로 들어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땅이 생긴 농민자제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도시에선 선전과 선동으로 응수했다. 베이징대학과 옌칭대학 학생들이 시작한 반미시위가 순식간에 대도시로 번졌다.

옌칭대학교장 시절 건축과 학생의 고건축 답사에 동참한 스튜어트. [사진 김명호]

옌칭대학교장 시절 건축과 학생의 고건축 답사에 동참한 스튜어트. [사진 김명호]

마셜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전쟁에서 이기면 이길수록, 국민당 정권의 근간이었던 도시민들이 등을 돌렸다. 이유가 있었다. 중일전쟁 승리 후 국민당 정부는 경제건설에 무심했다. 정부예산의 90%를 군에 쏟아부었다. 1946년 정부의 재정 총수입이 1조9791억이었지만 군비 지출은 6조였다. 미국의 원조를 제하면 재정적자가 4조3000억을 웃돌았다. 재정적자는 지폐 남발로 이어졌다. 국민정부 재정부 당안(檔案)에 의하면 장제스가 항일 전쟁을 선포한 1937년 17억원이었던 법정화폐 발행 총액이 1946년에 8조2000억으로 늘어났다. 1947년엔 40조로 증가했다.

중 물가 급등으로 도시민 생활 악화

중공근거지 옌안을 방문, 마오쩌둥(왼쪽 셋째), 주더(오른쪽 첫째), 저우언라이(왼쪽 첫째) 등 중공지도부와 기념사진을 남긴 미국대사 헐리. [사진 김명호]

중공근거지 옌안을 방문, 마오쩌둥(왼쪽 셋째), 주더(오른쪽 첫째), 저우언라이(왼쪽 첫째) 등 중공지도부와 기념사진을 남긴 미국대사 헐리. [사진 김명호]

통화팽창으로 물가가 치솟았다. 도시민들의 생활 수준이 최저점에 이르렀다. 통계에 의하면 당시의 일반 지식인과 대학교수, 중등교사, 작가, 기자, 정부고용원들의 실제 수입은 1937년에 비하면 7% 정도였다. 대학교수들은 더 심했다. 98% 감소했다. 국민당의 지원으로 최대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던 정치평론 잡지 관찰(觀察)의 주간(主幹) 추안핑(儲安平·저안평)의 글이 주목을 끌었다. “국민당은 도시민과 공무원을 포함한 지식인, 공상계(工商界) 인사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지금 저들은 현 정권에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 무능한 정권의 행패를 애통해하며 가슴을 친다. 말단 공무원들의 못된 작폐가 살아나고 공상계 인사들의 노기(怒氣)가 극에 달했다. 걸인 취급당한 도시민들의 원성은 헤아릴 길이 없다.” 이쯤 되면 돈 무서운 줄 모르는 망한 정부였다.

스튜어트는 미국의 구상을 성실히 수행했다. 틈만 나면 장제스를 설득했다. 이런 일기를 남겼다. “새벽에 장제스를 방문했다. 공산당이 연합정부 구성을 위한 회의를 했다는 정보를 전달했다. 홍콩에 있는 민주인사와 국민당 각 계파의 영수들과 연합해 중공의 전략에   대응하라고 했다. 장은 자력으로 입신한 사람이라 의심이 많다. 중공이 반격을 준비 중이라는 정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중공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자 국무부에 보고 전문을 보냈다. “국민당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용인(用人)에 문제가 많다. 지도자의 최대 금기사항인 임인유친(任人唯親), 친한 사람만 요직에 기용한다. 전문성 없는 무능한 지휘관들이 대세를 망치는 일이 빈번하다. 참담한 모습 대하며 거절할 날이 올까 우려된다.” 스튜어트의 우려는 예상보다 일찍 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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