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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노비제는 천리에 어긋나도다, 커다란 변고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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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조선은 노비제 사회인가

김홍도 『풍속도첩』중 ‘벼타작’. 보물 527호. 일꾼들은 나락을 터느라 바쁜데 자리 깔고 한잔하는 양반들은 분명 뒷담화에 오르지 않았을까. 정치적 자기의식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풍속도첩』중 ‘벼타작’. 보물 527호. 일꾼들은 나락을 터느라 바쁜데 자리 깔고 한잔하는 양반들은 분명 뒷담화에 오르지 않았을까. 정치적 자기의식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동방의 노비법, 개벽 이래 이런 것 없었도다. 백 대, 천 대 이르러도, 대대로 남의 노비 되네. 귀천의 형세가 억지로 정해지니, 커다란 변고로다 천리에 어긋나도다!” 조선시대 학자의 시 일부이다. 지은이는 윤봉구(尹鳳九·1681~1767).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제자로, 송시열의 묘지문을 썼으며 충청도에 살던 성리학자였다.

이 말은 그의 사상의 표현이기도 하고, 현실의 반영이기도 했다. 조선은 노비 반란이 없었다. 그러나 잘 드러나지 않는 일상에서, 즉 논두렁이나 주막에서 억압적이고 부당한 현실에 대해 화도 내고 험담도 했을 것이다. 원래 이렇게 작은 영역에서 정치적 자의식이 싹트는 법이다. 점차 재산축적, 양인화 소송, 국가 정책이 어우러지면서 노비는 사회적 위상을 높여갔다. 아마 이것이 반란이 없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건국 초반 천민→양인 전환 많아
양반 계층의 사노비 살상 금지돼
노비-주인간의 절대적 관계 없어
‘더 평등한 세상’ 향한 멀고 먼 길

소송, 재산축적 등으로 위상 높아져

조선 신분제는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거나 양반·중인·평민·천인으로 나누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반상(班常)의 차이도 강조되는데, 시대와 지역, 그리고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편차가 있다. 오늘은 신분제 중에서 노비 정책의 흐름을 살펴본다. 노(奴)는 남자, 비(婢)는 여자를 가리킨다.

노비는 주인에게 예속된 존재였다. 양반이나 양인은 국가에 대한 의무 외에 사회적으로 타 신분에 예속돼 있지 않았다. 노비를 서구의 노예나 농노에 비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예속, 채찍질, 성노리개, 매매 등 노비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동정과 선정성이 어우러져 피상적으로 관찰된다. 연구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노비의 매매 자체가 드물었다. 물론 그것이 신분의 불평등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황해도 백천군에 거주한 노비들의 가계와 신분 정보를 기록한 한글 호적문서. [중앙포토]

황해도 백천군에 거주한 노비들의 가계와 신분 정보를 기록한 한글 호적문서. [중앙포토]

처음 조선시대를 공부할 때 조선 초기에 대략 30% 정도의 인구가 노비였다는 사실을 알고 의아했다. 이 수치를 근거로 누구는 “조선은 전 국민의 반 가까이를 종으로 부린 시대”라고 비난한다. 또 어떤 학자는 조선사회를 ‘노비제 사회’라고 주장한다.

노비 같은 예속민은 전쟁 포로나 대규모 약탈로 조달되는 것이 일반 역사의 경험이다. 로마시대의 노예 조달, 유럽과 미국의 아프리카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납치가 대표적이다. 종종 채무, 자발적 의탁에 의해 노비가 되기도 하지만, 비율은 높지 않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는 그런 전쟁이나 약탈이 발견되지 않는다. 자국 백성이 노비인 것이다. 자국 백성을 노비 같은 예속민으로 삼는 것은 중국·유럽·아프리카 등 어느 곳이나 보인다. 일본은 16세기에 자국 백성을 노예로 수출하기도 했다.

아무튼 조선 인구의 노비 비율은 디폴트로 접근하는 게 상식에 맞다. 고려 때 인구 비율을 넘겨받은 것이리라. 고려 후기, 지배층이 산과 강을 경계로 삼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면서, 국가권력의 약화를 틈타고 불법적인 토지 침탈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일반 백성은 차라리 몸을 맡기는 예속민이 되거나, 압량위천(壓良爲賤)으로 노비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사료를 통해 충분히 확인된다.

공민왕 때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고 친원 귀족 세력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추진한 개혁은 이런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다. 전담 기구인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은 빼앗긴 토지와 노비가 된 양민의 원상회복을 위한 관청이었다. 하지만 고려 사회는 이 개혁을 감당하지 못했고, 조선 건국이라는 새로운 판을 기다려야 했다.

노비 출신 학자 송익필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삼현수간』. 보물 1415호. [사진 문화재청]

노비 출신 학자 송익필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삼현수간』. 보물 1415호. [사진 문화재청]

조선 정부는 건국 초부터 양인화 정책을 폈다. 태종 때 사찰에서 몰수한 노비는 공노비로 전환했는데, 이들은 독자적으로 살면서 공물을 바치고 양인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여진인 등을 양인으로 선포하고, 백정을 양인화했다. 정부에서 노비 소송을 지원해서 천민이 양인 신분을 얻게 했다. 주인의 사노비 살상도 금지했다. 양천의 교차 혼인을 금지하면서 고려시대 이래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한쪽이 천인이면 자식도 천인이 되는 길을 막고자 했다. 이런 양인화를 추구하는 조선 정부와, 노비가 재산인 소유주 사이의 대립이라는 밀고 당기는 역정이 조선 전기의 노비제를 둘러싼 상황이었다.

중엽에 접어들어 율곡 이이는 “종모법(從母法)이 양민 여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양민이 개인의 노비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다. 율곡이 말하는 종모법은 양인 남자와 천인 여자가 혼인하면 자식이 어미의 신분을 따라 천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종모법은 이중 잣대였다. 천인 남자와 양인 여자가 혼인할 때는 적용되지 않았다. 결국 당시 종모법은 어느 경우나 자식이 노비가 되는 불합리한 법이었다.

노비 출신 학자 송익필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삼현수간』. 보물 1415호. [사진 문화재청]

노비 출신 학자 송익필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삼현수간』. 보물 1415호. [사진 문화재청]

그러다 보면 양인의 숫자는 줄고 사노비가 많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이는 군역 확보 차원에서도, 사회 융화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이는 부모 가운데 한쪽이라도 양인이라면 자식도 양인이 돼야 한다는 원칙에서, ‘노양처종모법(奴良妻從母法)’을 주장했다. (명칭이 비슷해서 앞의 종모법과 헷갈리기도 한다)

이후 두 차례의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인 효종·현종대에 노양처종모법이 입법됐다. 이경억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주장한 것을 현종이 승인했다. 1669년(현종10)이었다. 재야의 유형원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 법은, 가까이 군역을 담당할 양정(良丁)을 확대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동시에 점차 노비제를 폐지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민생과 재정 안정되며 점차 사라져

그러나 일이라는 게 그리 쉽게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2차 예송 이후, 1678년(숙종4) 형조판서 이원정은 “종(奴)이 양녀를 처로 삼은 자는 양역(良役)을 꺼리고, 노와 주인 사이에 소송이 더욱 번거롭다”며 개정을 요청했고, 영의정 허적도 자신은 10년 전 법안에 반대했다면서 “겨우 10년 만에 그 폐단이 이와 같다. 종과 주인 사이의 사송이 어지러워 윤기(倫紀)가 무너지게 되었다”며 폐지를 주장했고, 마침내 노양처종모법은 폐기됐다.

1684년(숙종10) 우의정 남구만의 발의로 노양처종모법이 부활했으나, 1689년(숙종15) 기사사화(己巳士禍)를 겪은 뒤 다시 사라졌다. 영의정 권대운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좌의정 목내선, 김덕원 등은 “노비와 주인은 임금과 신하와 같다”‘며 폐지를 주장했다. 그리고 숙종 연간에 다시는 노양처종모법은 회복하지 못했다. 경종이 즉위한 뒤에도 신임사화라는 혹독한 정변을 겪으면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였다. 앞서 소개한 윤봉구의 시는 이 무렵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즉위한 뒤 조문명은 “노와 양처(良妻)에게 태어난 자식이 아비의 신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더욱 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꺼진 불씨를 되살렸다. 영조가 반대했으나, 양역 확보라는 정책 과제와 맞물려 1731(영조7) 법으로 확정돼 『속대전(續大典)』에 실렸다. 대동법·균역법으로 민생과 국가 재정이 안정되며 노비의 생활이 양인과 큰 차이가 없게 된 사회 현실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비제에 대한 이런 사상의 기조와 정책은 1801년(순조1) 납공(納貢)하던 내수사와 각 관청 노비의 양인화, 1886년 노비세습제의 폐지, 1894년 노비제의 전면 폐지로 이어질 수 있었다.

노비와 주인은 신하와 임금의 관계?

노비제를 두고 성리학을 탓하는 건 일제강점기 이래 여전하다. 이영훈은 “조선 유교는 노비-주인 관계를 추가하여 실은 육륜을 창출했으니 이 점은 유교의 본산인 중국에서 찾을 수 없는 조선 유교의 두드러진 특질의 하나”라고 했다. 삼강오륜에 더해 ‘6륜’이 됐다는 말이다. 본문에 언급한 ‘노비와 주인은 임금과 신하와 같다’는 주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조선 사람들은 끝내 ‘노비와 주인의 관계’를 ‘6륜’에 넣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주인-노비의 명분론을 뚫고 노비의 사회적·정치적 위상이 높아가고 있었고, 생각 있는 성리학자들은 그 성장을 사상과 정책으로 받아들였다. 걸핏하면 성리학만 탓하는 게으름으로는 실상에 다가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피지배 계층의 소곤거림, 인내와 억제 속에서 성장한 자기의식, 그것을 대변하는 지식층의 역할을 포착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