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로 구애한 文에 '공자'로 답한 習…'공자왈·맹자왈' 공방

중앙일보

입력 2021.09.17 15:00

업데이트 2021.09.17 15:22

‘맹자(孟子)’를 인용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공자(孔子)’로 답했다.

2017년 12월 중국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국빈만찬장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으로부터 바둑판과 바둑알을 선물 받고 있다. 청와대 제공

2017년 12월 중국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국빈만찬장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으로부터 바둑판과 바둑알을 선물 받고 있다. 청와대 제공

옛 문인을 연상시키는 한ㆍ중 정상의 대화 방식이다. 그런데 형식과 달리 내용은 전혀 고상하지 않았다. “친하게 지내자”는 문 대통령의 제안을, 시 주석이 “먼저 입장을 분명히 정하고 오라”고 맞받아치는 형국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1 시 주석의 선공

시 주석은 2017년 7월 문 대통령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서전(『운명』)에 ‘장강후랑최전랑(長江後浪催前浪)’,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다는 명언을 인용해 정치적 소신을 밝혀 깊은 인상을 남겼다”며 “한ㆍ중관계 개선과 지역 평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자”고 했다.

예우처럼 들린 이 말은 사실 선공(先攻)이었다. 당시 한ㆍ중 관계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ㆍ사드) 체계 문제로 얼어붙어 있었다.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다’는 말은 전임 정부와 다른 태도를 요구한 ‘뼈 있는 말’에 가까웠다.

2017년 중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현지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국빈방문이었음에도 문 대통령 부부가 노영민 당시 주중대사와 따로 식사를 한 것을 놓고, '혼밥'으로 명명된 '홀대 논란'이 일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2017년 중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현지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국빈방문이었음에도 문 대통령 부부가 노영민 당시 주중대사와 따로 식사를 한 것을 놓고, '혼밥'으로 명명된 '홀대 논란'이 일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2 문 대통령의 구애전

문 대통령도 한시(漢詩)로 반응했다.

문 대통령은 넉달 뒤인 2017년 11월 리커창(李克强) 총리를 비롯한 중국 각료들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증광현문(增廣賢文)’에 나오는 ‘일화독방불시춘 백화제방춘만원(一花獨放不是春 百花齊放春滿園)’이란 문구를 인용했다. ‘꽃이 한 송이만 핀 것으로는 아직 봄이 아니다. 온갖 꽃이 함께 펴야 진정한 봄이다’라는 뜻이다.

이는 시 주석이 2013년 보아오포럼과 2014년 중앙일보 기고문에서 썼던 말이다.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오기 위해 중국의 역할이 절실했던 문 대통령은 그해 12월 베이징대학 연설에선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로, 한국을 ‘작은 나라’로 지칭해 지나친 친중(親中) 외교라는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2019년 6월 21일 조선중앙TV는 전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환영하기 위해 평양 5·1 체육관에서 대집단체조 공연이 펼쳐졌다고 전했다. 사진은 중앙TV가 공개한 장면으로 공연이 끝난 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밝은 얼굴로 시진핑 주석과 대화하는 모습. 연합뉴스

2019년 6월 21일 조선중앙TV는 전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환영하기 위해 평양 5·1 체육관에서 대집단체조 공연이 펼쳐졌다고 전했다. 사진은 중앙TV가 공개한 장면으로 공연이 끝난 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밝은 얼굴로 시진핑 주석과 대화하는 모습. 연합뉴스

#3 비수가 된 시 주석의 '맹자'

시 주석은 2018년 11월 한ㆍ중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답방과 제2차 북ㆍ미 정상회담을 낙관하던 문 대통령에게 “일이 이뤄지는 데는 ‘천시ㆍ지리ㆍ인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맹자의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를 인용한 말로, ‘하늘의 운은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도 사람 간 화합만 못하다’는 뜻이다.

시 주석의 말은 비수(匕首)가 됐다. 중국과의 ‘인화’ 없이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즉흥적으로 이끈 대북 접촉이 결국 실패했기 때문이다.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 이후인 그해 12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1년전 시 주석이 직접 언급했던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를 그대로 재인용했다. 외교가에선 이를 중국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중국 전문가인 우수근 콘코디아 국제대 부총장은 “중국 외교의 고사성어는 극도의 은유를 통해 상대가 처한 상황을 가장 강하게 압박하는 수단”이라며 “특히 고수(高手)는 상황에 맞는 유사한 다른 표현으로 응대하는데, 문 대통령처럼 상대의 말을 그대로 재인용하는 것은 중국에선 하수(下手)적 대응이자 자칫 비굴한 태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고 했다.

#4 '맹자' 이은 시 주석의 '공자'

일방적이던 관계는 미ㆍ중 갈등 국면에서 급변했다. 문 대통령은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급격히 미국과 밀착했다.

특히 지난 5월 한ㆍ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대만 해협’과 중국 견제용 안보협력체인 쿼드(Quad)의 중요성이 명시됐다. 미국은 중국이 민감해하는 ‘미사일 지침 폐기’라는 선물을 안겼다.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5월 21일 오후(현지시간)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한국전쟁 명예 훈장 수여식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랠프 퍼켓 주니어 예비역 대령 가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5월 21일 오후(현지시간)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한국전쟁 명예 훈장 수여식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랠프 퍼켓 주니어 예비역 대령 가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그러자 시 주석은 이번엔 ‘공자’를 꺼냈다.

지난 15일 문 대통령을 접견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양국 수교 30주년을 언급하며 ‘삼십이립(三十而立)’이란 말을 인용했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삼십이립은 ‘서른 살이 되어 흔들리지 않는 뜻을 세운다’는 의미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장은 “외교부장의 말은 시 주석의 의지를 그대로 전달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한국이 미국에 밀착하는 상황에 대해 삼십이립이란 말로 미·중 관계에서 ‘분명한 입장을 세우라’고 강하게 압박한 것”이라고 말했다.

왕 부장은 특히 공개발언에서 “상대의 핵심적이고 중요한 관심 사안에 대해 상호 존중하고, 각자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고, 국민 정서를 상호 존중하는 전통을 가져왔다”며 “이런 전통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이는 양국의 건전한 발전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을 면전에 둔 장관급 인사의 작심 발언이 계속되자, 청와대는 왕 부장의 발언 중간에 취재진을 퇴장시키고 접견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중국 측이 외교적 결례를 범하고 있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을 접견하며 왕이 외교부장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청와대는 당시 왕이 부장의 말이 길어지자, 그의 발언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접견을 비공개로 전환시켰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을 접견하며 왕이 외교부장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청와대는 당시 왕이 부장의 말이 길어지자, 그의 발언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접견을 비공개로 전환시켰다. 연합뉴스

접견이 끝난 뒤 청와대는 시 주석을 대리한 왕 부장에게 “한ㆍ미 양국이 (대북) 대화 재개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했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을 강조해 소개했다. 한반도 문제 해결의 주체로 한ㆍ미를 앞세운 말이다. 시 주석에 대한 언급은 “북한의 대화 복귀 견인을 위한 역할과 지속적 협력이 필요하다. 시 주석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정도에 그쳤다.

문 대통령은 특히 왕 부장 접견 직후 중국이 민감해하는 잠수함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를 직접 참관했다.

#5 한·미 회담 없는 유엔총회


외교가에선 “임기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문 대통령이 미국과의 관계를 맹신해 급하게 한반도 문제에 접근할 경우 실패를 반복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영태 동양대 석좌교수는 “문 대통령과 달리 바이든 대통령, 시진핑 주석, 김정은 위원장은 시간이 많고 급할 게 없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한 힘의 우위와 주변국의 동의를 바탕으로 북한이 주도할 수 없는 대화 구도를 만드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배웅을 받으며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돌아가다 뒤돌아보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배웅을 받으며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돌아가다 뒤돌아보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오는 19일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한다. 코로나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면 참석을 결정했지만, 순방 중 별도의 한ㆍ미 정상회담은 성사되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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