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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맞았으니 올 추석엔 오거라"…가겠다는 자녀는 2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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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설 연휴 부산 수영구 도로변에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연휴 기간에 고향 방문 자제를 권장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 설 연휴 부산 수영구 도로변에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연휴 기간에 고향 방문 자제를 권장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송봉근 기자

“명절에 전 부치고 조금 쉬려고 하면, 어머님이 어느새 마늘 몇 접을 까자며 들고 오세요. 며느리 오면 함께 하려고 평소 쌓아뒀던 일감을 내놓으시는 거죠.”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이 모(45·서울 동대문) 씨는 올 추석 시댁을 방문할 예정이다. 각자 집에서 보냈던 지난해 추석, 올해 설과 달리 코로나 백신 접종을 마친 시부모님이 내려오라는 의견을 강력하게 내비쳤기 때문이다. 이 씨는 “시댁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회사 일과 아이 교육을 병행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연휴에 가사 노동까지 하려니 우울하다”며 “코로나 탓에 집에 있던 작년이 좋았다”고 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전통 명절 풍습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한층 빨라졌다. 지난해 강제로 ‘부모님댁 방문 및 명절 노동’ 의무로부터 해방을 맛본 이들은 앞으로도 명절에 휴식 또는 개인 생활을 원한다고 고백했다.
10년 전만해도 귀경길 교통대란을 감수하고 온 가족이 큰집에 모여 차례 음식을 준비하는 게 명절의 필수로 여겨졌지만, 맞벌이 부부가 급증하고 성 평등 인식이 높아지면서 휴식이나 여행 등 각자의 연휴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올 추석 ‘고향 간다’ 비중 24%

명절의식 변화 설문조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명절의식 변화 설문조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중앙일보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와 함께 전국 20~60대 252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번 추석 연휴에 ‘집에서 쉰다’는 답변이 53%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부모님댁을 방문할 계획(24%)이라는 응답의 두 배를 훌쩍 넘는 수치다. 코로나 확산세가 영향을 미친 것도 있지만, 호캉스와 국내 여행 계획도 각각 12%와 11%를 차지했다. 특히 40대 이상은 ‘집콕’ 선호가 두드러졌고, 20·30대는 여행과 같은 야외 활동을 즐기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맞벌이 부부인 박주연(34·서울 영등포) 씨는 “남편과 휴가 시기를 맞추기 어려운 때가 많았는데 올 추석엔 오랜만에 강원도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며 “‘코시국(코로나 시국)’에 어려운 분들이 많아 좋은 티는 못 냈지만 우리끼리 오붓하게 보내는 추석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 자유를 만끽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명절의식 변화 설문조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명절의식 변화 설문조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가정도 줄었다. 갈비를 재우고, 전을 부치는 등 전통 방식으로 손수 차례 음식을 준비한다는 비중(30%)보다 평상시와 다를 것 없이 먹겠다는 응답이 34%로 더 많았다. 밖에서 사 온 음식으로 상을 차리겠다는 비중도 36%나 됐다.

혼자 사는 직장인 신 모(38·서울 강남) 씨는 “기름진 명절 음식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고, 추석이라고 특별한 상을 차려야 할 이유도 못 느낀다”며 “모처럼 쉴 기회이니 편하게 배달 음식 좀 시켜먹고, 넷플릭스를 보며 재충전의 여유를 누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10명 중 7명 “명절에 부모님댁 가기 싫다”

명절의식 변화 설문조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명절의식 변화 설문조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응답자의 10명 중 7명은 명절에 부모님댁(또는 큰집) 방문이 꺼려진다고 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귀경길·귀성길 교통대란(25%)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감염 우려로 자가용 이용이 늘면서 교통체증이 극에 달할 전망이다. 국토교통부와 한국교통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올 추석 연휴 이동 시 승용차를 타겠다는 비율은 94%로, 지난해 추석(91%)이나 코로나 발생 전인 2019년 추석(85%)보다 늘어났다. 엿새 동안 예상되는 총 이동 인구 역시 3226만명으로, 지난해(3116만명)보다 4% 증가했다.

교통체증 외에도 명절 음식 만들기 등 가사 노동(19%), 밀린 업무 또는 휴식 필요(17%), 부모님 용돈·선물 부담(14%), 결혼·취직 등 잔소리(13%) 등이 가족 모임에 있어 스트레스 요인으로 나타났다.

명절의식 변화 설문조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명절의식 변화 설문조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런 ‘자유로운 연휴 보내기’ 추세는 코로나가 끝나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면 명절 연휴를 어떻게 보낼 계획인지 묻는 질문에 ‘과거처럼 명절에 부모님댁을 방문하겠다’는 응답은 34%에 불과했다. 대신 집에서 쉬거나(42%), 여행 또는 호캉스(24%)를 가겠다는 이들이 66%로 과반을 훌쩍 넘었다.

“개인 삶 존중하는 변화는 긍정적”

명절의식 변화 설문조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명절의식 변화 설문조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대가족 모임이 줄어드는 한국의 명절 풍습 변화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전통문화가 사라져서 아쉽다’는 답변도 39%나 됐지만 ‘개인 삶을 존중하는 합리적인 변화’라고 평가한 사람이 61%였다. 특히 부모로부터 독립해 직장을 갖고 각자의 삶을 꾸리는 시기인 30·40대가 이런 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특히 젊은 층은 과거처럼 모든 가정이 획일화된 명절의 풍습을 ‘의무’처럼 지킬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모일 사람은 모이고, 여행가거나 쉬고 싶은 사람은 쉬면서 연휴만큼은 각자의 상황에 맞춰 즐겁게 보내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박 씨는 “맞벌이 며느리 입장에서 설날·추석·어버이날·생신 등을 모두 챙기다 보면 가족 모임이 거의 한 달에 한 번꼴이기 때문에 부담스럽다”며 “설은 부모님과 보내고 추석은 각자 보내거나, 명절 전 주말에 미리 찾아뵙고 연휴엔 여행을 즐기는 등 유연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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