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하현옥의 시시각각

'악덕 전주'된 2200만 연금 가입자

중앙일보

입력 2021.09.16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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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팀장
지난 3일 오전 일산대교에서 열린 ‘일산대교 공익처분 계획 합동 브리핑’. 이재명 경기지사(왼쪽 네번째)와 파주시장, 김포시장, 고양시장. 지역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다. 경기도

지난 3일 오전 일산대교에서 열린 ‘일산대교 공익처분 계획 합동 브리핑’. 이재명 경기지사(왼쪽 네번째)와 파주시장, 김포시장, 고양시장. 지역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다. 경기도

 인류의 문명화 과정을 되짚은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오늘의 경제 체제를 가능케 한 요소로 ‘미래에 대한 신뢰’를 꼽는다. 그 바탕 위에 사람들이 ‘신용’이라는 특별한 종류의 돈을 만들었고, 신용이 미래를 비용 삼아 현재를 건설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이재명의 일산대교 공익 처분
경제체제 근간인 신뢰 뒤엎고
·노후자금 국민연금에도 손실

 이를 실현하는 수단이 투자다. ‘투자는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데 쓰이는 기본 기술이다. 그래서 연기금은 주식이나 채권 같은 금융자산을 보유한다. 투자하게 만드는 제일 중요한 원인은 미래에 더 많이 소비하리라는 기대다.’(윌리엄 N 괴츠만『금융의 역사』)

 미래에 대한 신뢰와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시도가 등장했다. 유력 대선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가 내건 일산대교 무료화다. 한강의 27개 자동차 교량 중 유일하게 통행료를 받는 일산대교는 대림산업 등 5개 사가 2200여억원을 들여 2008년 11월 개통했다. 소유권을 경기도에 넘기는 대신 30년 동안 통행료를 받아 투자비를 회수(수익형 민자사업)하는 방식이다. 국민연금은 2009년 일산대교㈜의 지분을 2500억원에 100% 인수했다. 인수 이후 적자 행진을 이어 가다 8년 만인 2017년에야 흑자 전환했다.

 민자 사업은 경제성이 떨어지거나 막대한 자금이 소요돼 중앙이나 지방정부가 뛰어들 수 없는 사업에 민간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투입 자금 회수를 위해 일정 기간의 운영권과 최소 운영 수입 보장권 등을 부여한다. 현재는 불확실하지만 미래 수익을 내세워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다.

 돈을 대긴 어렵지만 다리는 필요했던 경기도와 908조원에 이르는 적립금 운용을 위해 장기 투자처가 필요했던 국민연금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지점이 일산대교다. 하지만 표심을 겨냥한 이 지사의 ‘공익 처분’ 도발에 상황은 달라졌다. 공익 처분은 사회기반시설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지자체가 민자 사업자의 관리·운영권을 취소한 뒤 상응하는 보상을 하는 것이다. 지자체 최초다.

 경기도가 국민연금에 제시하는 보상금은 2000억원 정도로 알려졌다. 당초 계약대로 운영권을 부여한 2038년까지 국민연금이 기대하는 수익은 7000억원이다.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5000억원가량의 손실이 생긴다. 국민의 노후를 책임질 미래 자본을 갉아먹는 셈이다. 배임 논란도 피할 수 없다.

 초저금리 시대에 국민연금은 주식과 채권 투자의 비중을 줄이고 대체투자 비율을 늘려가고 있다. 올 상반기 기준 10.4%인 대체투자 비중을 2026년 말까지 15%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삥 뜯기’로 비치는 공익 처분의 위험성이 고개를 든 순간 ‘미래에 대한 신뢰’에 기반을 둔 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당장은 사이다 같은 일산대교 통행료 무료 혜택은 또 다른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경기도가 국민연금에 지불할 손실보상금은 경기도와 인근 3개 시(市)가 분담하게 된다. 늘어난 세금 고지서나 지방정부의 다른 사업 예산 축소는 불을 보듯 뻔하다. 국민연금이 실제 예상 수익보다 낮게 책정한 보상금을 받는다면 가입자의 연금도 쪼그라들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지사는 국민연금을 겨냥해 ‘고리(高利) 악덕 사채업자’ ‘과도한 통행료 징수’ ‘혈세 지원’ 등 대중의 공분을 자극할 만한 용어를 투척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노후를 위한 자금을 맡긴 국민연금 가입자 2200만 명은 졸지에 ‘악덕 전주(錢主)’가 됐다.

 국민연금을 눈먼 돈 혹은 쌈짓돈 정도로 여기지 않고서야 득표라는 사익을 위해 ‘미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이 지사의 도발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말대로 일산대교 통행료 무료는 “이익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를 위한 조삼모사일 뿐이다.

 첨언 하나. 국민연금이 해외 대체투자에 나섰다가 경기도의 일산대교 공익 처분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이 지사는 그때도 국민연금을 ‘악덕 전주’라 매도할까. 아니면 상대가 나쁘다고 맹공할까.

하현옥 금융팀장

하현옥 금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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