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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박지원 국장원장, 그리고 두 번의 8월 11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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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박지원 원장은 지난 2004년 불법 대북송금으로 재판받을 당시 휠체어를 타고 안대를 한채 법정에 출두했다. [중앙 포토]

박지원 원장은 지난 2004년 불법 대북송금으로 재판받을 당시 휠체어를 타고 안대를 한채 법정에 출두했다. [중앙 포토]

국민의힘 대선 예비 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고발 사주 의혹'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 여야를 오가며 정치판을 기웃거리던 조성은(33) 올마이티미디어 대표(※직원은 한 명도 없다고 본인이 밝혔다)가 의혹을 폭로하기 3주 전인 지난 8월 11일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단둘이 만났다는 게 언론 보도로 뒤늦게 드러나면서다. 여당 주장대로 '윤석열 게이트'의 시작인지, 아니면 야당 공세처럼 얼떨결에 국정원의 불법 정치 공작을 폭로해버린 '박지원 게이트'인지, 진실 규명은 차차 이뤄질 거다. 하지만 어떤 결말이 나든 박지원(79) 국정원장의 부적절한 처신은 꼭 기록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제보자'와 국정원장이 만난 8월 11일부터 하나하나 따져보자. 만남이 이뤄진 미묘한 시기만큼이나 서울 롯데호텔 38층 모모야마라는 장소도 논란거리다. 롯데호텔은 2011년 인도네시아 특사단 방 잠입 사건을 비롯해 국정원과 악연이 깊은 곳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8년, 국정원장도 아닌 2차장이 여당 인사들을 이 호텔에서 만난 사실이 알려져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김회선 2차장을 검찰에 고발하기까지 했다.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국정원 취득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그 중심에 박지원 원장(※그땐 민주당 의원)이 있었다. 하필 이날도 8월 11일이었다. 그는 "부적절한 만남"이라며 국정원장에게 대국민 사과를 하라고 따졌다. 송영길 의원도 "개인 처신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공무 집행자로서 상당한 무게감을 갖고 움직여야 했다"고 공세를 펼쳤다.

 지난 2018년 국민의당 전체회의에서 박지원 국정원장(오른쪽)과 조성은씨가 대화하고 있다. [뉴스1]

지난 2018년 국민의당 전체회의에서 박지원 국정원장(오른쪽)과 조성은씨가 대화하고 있다. [뉴스1]

바로 그 호텔에서 꼭 13년이 흐른 후 대통령 비서실장과 장관, 당 대표를 지낸 79세의 노회한 국정원장이 야당의 유력 대선 주자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 중이던 33세 여성과 단둘이 만났다. 조씨는 최근 한 방송 인터뷰에서 "9월 2일(최초 보도)이라는 날짜는 우리 (박지원) 원장님이나 저가 원했던, 제가 배려받아서 상의했던 날짜가 아니거든요"라며 사실상 정치 공작을 고백하는 듯한 발언을 무심코 뱉어 버렸다. 또 박 원장을 만나기 바로 전날 본인 휴대전화에 집중적으로 자료를 캡처하는 등 둘이 같이 '고발 사주' 문제를 상의했다는 정황이 이어지고 있다.

"사적 만남"에 일인당 13만원짜리 호텔 식사 

하지만 일단 두 사람 모두 "사적인 대화만 나눴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을 믿는다 해도 여전히 적잖은 문제가 있다. 모모야마는 룸을 예약하면 일 인당 최소 13만원에서 많게는 28만 원짜리 코스 요리만 주문 가능한 최고급 일식집이다. 국정원장이 주말이나 휴가도 아닌 업무의 연장선에 있는 평일 점심에 46살 어린 여성과 단둘이 만나 고급 요리를 즐기며 사적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부적절하다. 둘의 사적 만남에 쓰라고 국정원에 1조원이나 되는 막대한 예산을 몰아준 건 아닐 테니, 만남의 성격이 무엇이든 물타기가 쉽지 않다. 조씨는 지난 2월 14일에도 국정원장 공관에 초청받았다. 방문 다음 날 페이스북에 '공개되면 이혼할 사람들 많을 거다. 어제 다섯 시간 넘게 나눴던 말씀이 생각나서 엄청 웃었네. 머리 꼭대기에 계시던데'라고 올린 걸 보면 둘의 관계가 궁금해진다. 국정원이 현재 유력 인사들의 사생활을 불법 사찰한 내용을 다섯 시간이나 공유하는 사이는 공적 관계일까, 아니면 사적 관계일까.

지난 2월 14일 국정원장 공관을 다녀온 다음날 조성은씨는 국정원의 유력인사 사생활 사찰을 암시하는 SNS게시글을 올렸다. [페이스북 캡처]

지난 2월 14일 국정원장 공관을 다녀온 다음날 조성은씨는 국정원의 유력인사 사생활 사찰을 암시하는 SNS게시글을 올렸다. [페이스북 캡처]

어쨌든 조씨의 부주의한 과시욕 탓에 박 원장의 부적절한 행보가 드러났고, 그 결과 국정원의 부당 정치 개입이라는 야당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런데도 박 원장은 자중하기는커녕 언론 인터뷰에서 "윤석열의 모든 것을 알지만 국정원장이라 말 못 한다, 잠자는 호랑이의 꼬리를 밟지 말라"며 야당 대선 주자를 향해 오히려 공개적인 협박을 했다. 앞에선 과거의 불법 사찰과 정치 개입을 사과하면서 뒤로는 사찰을 지속했다는 의혹을 사기 충분한데, 이를 토대로 협박까지 하는 국정원장이라니, 정말 국민이 왜 이런 꼴까지 봐야 하나 싶다.

호텔로 유죄 받은 원세훈 잊었나

마지막으로 호텔 얘기를 하나만 더 해야겠다. 제보자 조씨와 박 원장이 만난 8월 11일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파기환송심이 있던 날이기도 했다. 이날 검찰은 원 전 원장에 징역 15년과 추징금 165억원을 구형하며 국정원이 야권 정치인 사찰에 예산을 부당하게 사용한 죗값을 물었다. 앞서 2심에서도 롯데호텔 등 유명 호텔 방을 빌리는 데 국정원 특수활동비 29억원을 사용한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정권이 바뀐 후 박 원장의 미래가 보인다고 얘기하면 너무 심한 악담일까. 고(故) 김대중 대통령을 같이 모셨던 장성민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의 말마따나 "(2004년 대북 불법 송금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다시 휠체어 타고 수인번호 찍힌 수의를 입고 법정과 교도소를 드나드는 불행한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