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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사과나무 심는 희망으로…‘만복이네 떡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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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문화팀장

이지영 문화팀장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게 이런 심정일까.

어린이뮤지컬 ‘만복이네 떡집’이 곧 초연 무대에 오른다. 하던 공연도 멈출 판인 코로나19 시국에 용감한 시도다. 단체관람 의존도가 높았던 어린이 공연계는 코로나로 입은 타격이 특히 크다. 학교도 제대로 못 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을 찾는 부모가 흔치 않으니, 썰렁한 객석이 당연한 풍경이 돼버렸다. 인지도 높은 흥행작 재연으로 근근이 유지되고 있는 게 요즘 어린이 공연계다.

신작 어린이 뮤지컬에
정상급 제작진 대거 합류
코로나 타격 막막하지만
‘위키드’‘마틸다’ 꿈꾼다

이런 상황에서 공연제작사 아츠온 심재훈 대표가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순 없다”며 나섰다. “현실이 아무리 막막해보여도 공연 만드는 사람은 공연을 꾸준히 만들어야 한다”면서 내린 결정이다. 지난해 처음 뮤지컬 ‘만복이네 떡집’을 기획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이런 시기에 무슨 신작이냐”는 만류 일색이었다. 하지만 막상 제작에 돌입해 스태프들을 모으고 배우를 캐스팅하는 과정은 코로나 이전보다 더 순조로웠다.

경기 구리아트홀에서 연습 중인 뮤지컬 ‘만복이네 떡집’ 배우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경기 구리아트홀에서 연습 중인 뮤지컬 ‘만복이네 떡집’ 배우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국내 뮤지컬계 정상급 제작진이 합류했다. 뮤지컬 ‘아랑가’의 작가 김가람, ‘윤동주 달을 쏘다’ 음악감독 이경화, ‘레드북’ ‘여신님이 보고계셔’ 무대디자이너 이은경, ‘프랑켄슈타인’ ‘벤허’ 조명디자이너 민경수, ‘지킬 앤 하이드’ 음향디자이너 권도경, ‘레베카’ 영상디자이너 송승규 등 제작비 적은 어린이 공연에서 평소라면 보기 힘들었을 이름들이다. 연출을 맡은 홍승희 감독은 블록버스터 뮤지컬 ‘위키드’ ‘레미제라블’ 등의 협력연출 출신으로, ‘알사탕’ ‘장수탕 선녀님’ 등의 히트작을 낸 바 있다.

“미래를 보고 만들어보자는 데 뜻을 모았어요. 돈 때문에 안 한다는 건 공연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태도가 아니다, 라고 생각했죠. 공연은 계속돼야 하니까요.”(홍승희)

어린이 공연의 메카, 대학로 학전소극장의 대표 김민기도 이들과 비슷한 말을 했다. 객석 194석의 학전소극장은 코로나 이후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최대 90석까지밖에 티켓을 못 판다. 공연시장이 살아나고 있다는 요즘에도 회당 관객 수는 40∼50명 수준이다. 할수록 손해인 상황이지만 학전의 어린이 공연은 멈추지 않았다. 올해 ‘진구는 게임 중’ ‘무적의 삼총사’ 등을 무대에 올렸고, 현재 뮤지컬 ‘우리는 친구다’가 공연 중이다. 학전의 임수빈 홍보담당자는 “공연하는 게 우리 일”이라고 한 대표 김민기의 말을 전했다. 환경이 열악해져도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는 뚝심이다.

뮤지컬 ‘만복이네 떡집’ 홍승희 연출(왼쪽)과 심재훈 제작자.

뮤지컬 ‘만복이네 떡집’ 홍승희 연출(왼쪽)과 심재훈 제작자.

뮤지컬 ‘만복이네 떡집’은 제작비 마련도 ‘의기투합’ 식으로 했다. 제작사와 크고 작은 인연이 있었던 구리문화재단·여주세종문화재단·오산문화재단 등과 뜻을 모아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의 ‘방방곡곡 문화공감 사업’ 공모에 도전했고, 1억5000만원의 제작비 지원을 받게됐다. 각 재단에서도 5000만원씩 제작비를 보탠다.

지난 13일 오후 경기도 구리시청 옆 구리아트홀에선 공연 연습이 한창이었다. 배우들은 마스크를 쓴 채로 뛰고 구르며 노래를 불렀다. 보는 것만으로 숨이 차는 상황이었지만 누구 하나 마스크를 내리지 않았다.

코로나는 제작 과정 하나하나를 참 어렵게 만들었다. 출연배우 9명을 오디션으로 뽑는 데도 2주나 걸렸다. 마스크를 벗을 수밖에 없는 심사 과정에서 지원자들의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일대일 시간 약속을 잡아 진행하느라 기간이 늘어난 것이다. 한 명이라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으면 공연을 올릴 수 없는 현실에 매일이 긴장된 방역 상황이다.

공연은 다음달 9·10일 구리아트홀을 시작으로 오산문화예술회관(10월 16·17일), 여주세종국악당(12월 3·4일)으로 이어진다. 확정된 공연은 단 9회. 표가 매진돼도 적자는 예고돼있다. 그래도 제작자 심 대표의 포부는 크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대극장에서 장기 공연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만복이네 떡집’은 김리리 작가가 쓴 동명의 동화가 원작이다. 초등 3학년 만복이와 장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애들 얘기지만 어른에게도 신선한 깨달음을 주는 대목이 여럿이다. 이를테면, 심술쟁이 외톨이 만복이를 변화시키는 첫 번째 떡이 바로 ‘말을 못하게 되는 찹쌀떡’이다. 그 떡의 효과를 지켜보다 보면 “입부터 닫아야겠다”는 경각심이 어느새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심재훈 대표와 홍승희 연출 모두 “이 작품을 어린이용으로 선 긋지 않는다”고 했다. 동화에서 출발했지만 전 세계 성인 관객들까지 매료시킨 뮤지컬 ‘마틸다’나 ‘위키드’처럼 세대를 아우르며 생명력을 오래 이어가겠다는 꿈을 꾼다. 사과나무를 심는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