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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국과민족이 저격한다

정치 오래하면 20조 굴린다? 김 총리님, 가필드 암살 아시나요

중앙일보

입력

조국과민족 전직 공무원

김부겸 총리님.
최근 한국성장금융의 투자운용2본부장으로 황현선 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이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국성장금융은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해 지난해 7월 조성해 2025년까지 20조원 규모로 키우겠다고 한 대형 펀드인 ‘한국판 뉴딜 펀드’를 운용하는 금융 공기업입니다. 문 대통령이 지난 1월 5000만원을 투자했다고 청와대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한 바로 그 펀드 말입니다. 20조원이라는 규모로 보나, 또 펀드 재원 상당 부분을 민간에서 조달하려는 계획으로 보나 당연히 운용은 전문가가 맡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자산 운용 경험이 전혀 없는 황 전 행정관이 뉴딜 펀드 운용을 책임지는 본부장 후보로 올랐습니다. 경력이라고는 국회의원 보좌관과 더불어민주당 기획조정국장, 민정수석실 행정관뿐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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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 펀드에는 민간자금이 13조원이나 들어갈 계획입니다. 뉴딜 펀드만이 아닙니다. 한국성장금융은 2조원 규모의 기업구조조정 펀드를 통해 중견·중소기업 구조조정에도 관여합니다. 운용본부장은 이 귀한 돈을 적재적소에 투자하여 투자자에게 수익을 돌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막중한 자리에 단 한 번도 투자업무를 경험한 적이 없는, 다시 말해 전문성과 자격이 없는 인물이 추천된 것입니다. 조직을 쪼개 없는 자리까지 만들어가면서요.
낙하산 논란이 불거지자 청와대는 "전직 청와대 직원이 개인적으로 취업을 한 사안"이라며 "청와대가 관여하는 인사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청와대 해명이 사실이라면 더 의아합니다. 관련 경력과 전문성이 전혀 없는 인물이 낙하산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이유로 20조원을 운용하는 총괄로 내정되었는지 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에서 오래 일해 괜찮다" 

낙하산만큼이나 김부겸 총리님 발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정치인의 인식도 큰 문제입니다. 김 총리님은 "당에서 오래 일을 해서 전혀 흐름을 모르는 분은 아니다"라며 황 전 행정관 내정을 옹호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당에서 하는 일과 대규모 자산을 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정치권에서는 사회 각 분야를 책임지는 이들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정치적 논공행상의 대상물로 바라보는 게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시민단체 대표들이 지난 7월 1일 감사원 앞에서 공공기관 낙하산 임원의 기부·후원과 예산 오·남용의 공익감사를 청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민단체 대표들이 지난 7월 1일 감사원 앞에서 공공기관 낙하산 임원의 기부·후원과 예산 오·남용의 공익감사를 청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기성세대에겐 이런 낙하산이 별 대수롭지 않은 관행처럼 받아들여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2030 세대는 믿어온 공정과 너무나 다른 현실에, 또 능력이 아닌 진영에 따라 자리를 나눠 갖는 걸 보고 좌절합니다. 일할 의욕이 싹 사라질 정도입니다.
특히 공무원은 더합니다. 아니, 낙하산을 자주 목격하다 보니 이젠 오히려 무덤덤해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 공무원 선배는 "윗자리는 어차피 정치적으로 임명되기 마련이라 그런가 보다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전문성을 키우려는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거 같아 괴롭기도 하다"고 하더군요. 최근 술자리에서 만난 한 중앙부처 공무원은 “금융 같은 고도의 전문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조차 비전문가를 낙하산으로 내려보내는 걸 보면 이 정부는 전문가 집단을 무시한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제 또래의 다른 젊은 공무원들도 비슷한 얘기들을 합니다. 비단 금융 분야만이 아니라 온갖 정부 부처와 산하 기관에 비전문가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것까지는 참겠는데 “업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는 사람들을 상사로 모시려니 업무 진척이 너무 느려 일하기가 너무 힘들다”고요. 해당 분야의 기초적인 용어조차 알지 못해 공무원들이 써준 발표자료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말을 하는 장·차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능력보다 수저·인맥 따지는 시대

이런 분위기는 공무원 준비생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한 공시생은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차라리 아무 대선 캠프에 들어가 선거운동을 돕는 게 인생에 훨씬 더 유리한 것 아닌가 싶다"는 자조 섞인 얘기까지 합니다.
넘치는 패기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 2030 세대가 "능력과 경력보다 무슨 수저를 물고 태어났는지, 아니면 어떤 인맥을 쌓았는지가 더 중요한 게 아니냐"라고 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총리님. 적잖은 국민의 안녕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전문 직위만이라도 실력과 경력에 따라 쥐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공정 아닌가요. 단지 당에서 오래 일을 했다고 20조원을 다루는 금융기관 본부장으로 낙점하는 게 공정일 리가 없습니다. 정치권력의 부당한 폭거일 뿐입니다.

낙하산으로 파국 맞은 가필드 

미국 20대 대통령 가필드는 1881년 취임했으나 200일만에 암살당했다. [미국 대사관]

미국 20대 대통령 가필드는 1881년 취임했으나 200일만에 암살당했다. [미국 대사관]

과거 미국에서도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이 공공부문 고위직을 마치 전리품처럼 나눠주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20대 가필드 대통령의 암살로 끝났습니다. 파리 주재 미국 공사 임명이 거절된 데 앙심을 품은 인사가 대통령을 총으로 살해한 것입니다. 이렇게 공정이 무너진 곳에는 결국 사회적 파국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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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전 행정관의 운용본부장 내정이 논란이 되는 사이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한유진 전 노무현 재단 본부장이 예탁결제원 상임이사로 내정되었다가 슬그머니 물러났습니다. 정권 주변 사람들이 낙하산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대신 최소한의 전문성을 갖춘 인사들이 고위직에 임명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