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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사서 고생’하러 나섰다가 머리가 하얗게 센 총각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68)

일평생 살면서 고생이란 걸 하나도 하지 않고 살 수도 있을까? 어느 시점, 어떤 환경에서는 좀 죽도록 고생도 해봐야 사람이 성장하고 어른 노릇도 하게 되고 그러는 건가? 고생에는 몸 고생도 있고 맘고생도 있는 법. 내가 한 고생은 무엇이 있을까? 아직 겪어보지 않은 고생은 무엇이 있을까?

기왕이면 고생은 겪지 않는 게 좋기도 하겠지만, 일생에 정말 아무런 고생 없이 편안한 나날만 이어질 수 없다. 정말 고생 끝에 낙은 올까. [사진 pixabay]

기왕이면 고생은 겪지 않는 게 좋기도 하겠지만, 일생에 정말 아무런 고생 없이 편안한 나날만 이어질 수 없다. 정말 고생 끝에 낙은 올까. [사진 pixabay]

옛날에 한 총각이 대체 ‘고생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졌다. 별로 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다 보니 고생이란 게 어떤 건가, 고생을 한번 구경이나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한 사람이 “어디든 정처 없이 떠나 봐라. 그러면 고생이란 걸 자연히 구경할 것”이라고 권했다. 총각은 그렇다면 내가 한번 세상에 나가 고생이란 게 뭔지 좀 알아나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길을 떠났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 한 집에 묵기를 청했다. 집에 혼자 있던 부인이 좀 주저하다가 총각을 맞아들여서는 집안에 우환이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앓던 시어머니가 그날 돌아가셨는데, 약을 구하러 나갔던 남편이 여태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틀림없이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집을 지키고 있겠소? 아니면 나와 함께 우리 남편을 찾으러 나서겠소?”
“에이, 나 혼자 송장 지키고 있는 건 무서워서 안 되겠고 같이 나갑시다.”

총각이 그렇게 부인과 함께 찾아 나서 보니 동네 나가는 고갯마루에서 호랑이가 남편을 잡아먹고 있었다. 호랑이가 한참 뜯어 먹는 걸 본 부인은 “이게 무슨 짓이냐” 하고 호랑이에게 덤벼들었다. 이에 놀란 호랑이가 저만치 비켜서는 걸 보고 부인은 시신을 수습하려면 연장이 있어야겠며, “당신이 여기서 송장을 지키고 있겠소? 아니면 우리 집에 가서 호미를 가져오겠소” 했다. 총각은 호랑이가 더 무서웠으므로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집에 갔더니 시어머니 송장이 뚝딱뚝딱 소리를 내며 마당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총각은 놀란 가슴 부여잡고 얼렁뚱땅 창고를 뒤져 손에 잡히는 대로 호미를 들고는 오금아 날 살려라 하고 달려나갔다.그때까지 호랑이를 쫓으며 송장을 지키고 있던 부인은 총각이 가지고 온 연장으로 그 자리를 수습하고 송장을 치마에 싸서 짊어지고 나서면서, “당신이 송장을 짊어지고 가겠소, 아니면 내 뒤를 따르면서 횃불을 잡고 호랑이를 쫓겠소” 했다.

총각은 호랑이를 쫓아내느니 송장을 짊어지고 뛰겠다고 하면서 부인에게 호랑이를 쫓으라고 하고 그냥 불이 나게 뛰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호랑이는 어느새 가 버렸지만 집에선 시어머니 송장이 여전히 마당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걸 본 부인이 “아니, 죽은 송장이 마당에서 돌아다니다니 곱게 죽지 못하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면서 송장을 탁 쳤더니 나가 자빠졌다. 부인은 총각과 함께 집 뒤꼍 밭에 두 송장을 밤새 매장했다.

이 총각 참, 세상 구경 제대로 헸다. 아니, 이게 세상 구경이긴 한가? 어느 집에 하룻밤 묵어가길 청했을 뿐인데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는 걸 보질 않나, 그 먹다 남은 시신을 수습해야 하질 않나, 관에 모셔놓았던 송장이 돌아다니는 걸 보질 않나, 별 해괴한 경험을 다 했다. 그나마 덜 무서운 쪽으로 선택했지만 번번이 호되게 당하기만 했다. 게다가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해괴한 일을 겪으며 한잠도 자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웠더니 이 부인이 총각에게 함께 살자며 따라나선다.

“이제 남편도 죽고 시어머니도 죽고 이 산속에서 혼자 살아갈 길 막막하니 당신을 따라나서겠소.”

총각은 이렇게 독한 여자와는 살 도리가 없어 당신하고는 살 수 없다며 혼자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부인은 “정 그러면 그냥 가시되, 가시다가 한 번 돌아보고 가시오” 했다. 총각이 한참 가다 돌아보니 부인이 집에 불을 지르고 지붕에 올라가서 ‘나 죽는다’며 불에 뛰어들었다.

총각이 더 돌아다니지 못하고 기진맥진해 그냥 집으로 돌아갔는데, 동네사람들이 총각을 보고도 알은체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왜 날 보고도 인사를 안 하느냐” 하니 “당신이 누군데 그러시냐” 했다. 이 총각이 밤새 머리가 온통 하얗게 세어 버려 동네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 총각이 밤새 어찌나 고생했던지 머리가 온통 하얗게 세어 버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생이 대체 뭔가, 어떻게 생겨먹은 거냐, 궁금해했던 총각이 정말 호되게 당했다. 과연 세상살이는 그렇게 혼을 빼놓을 만큼 무섭고도 독한 것이겠다.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듯, 집 밖만 나서면 온통 위협으로 가득하여 목숨 부지하고 사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겨우 수습해 집에 돌아와도, 집안엔 망령이 떠돈다. 송장이 집안에 돌아다닌다고 하면 언뜻 좀비 같은 형상을 떠올리기 쉬운데, 실제로 좀비가 집안에 돌아다녔다기보다는, 집안에는 뭔가 과거의 망령 같은 것, 이 집안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꼭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 같은 것이 존재하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피하려고 애도 써 보고 어떻게든 덜 어려운 쪽으로 선택해 보지만, 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고생 거리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리는 일은 역사 속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기록이 있다.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안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직전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렸다고 하고, 헨리 8세의 이혼을 반대하다가 처형당한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도 처형 전날 밤 머리가 백발로 변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일컫는 말이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이다. 프랑스 대혁명 때 처형당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로 끌려가기 전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온통 새하얗게 변해 버렸는데,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나 공포, 슬픔 때문에 머리가 갑자기 세어 버리는 현상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그림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윌리엄 해밀턴, 1794.

그림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윌리엄 해밀턴, 1794.

곧 명절이다. 그러나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들 고생스런 시절을 보내고 있기에 즐거울 수가 없다. 연휴가 5일로 긴 편이지만 5인 가족이 어디 잠시 바람 쐬러 다녀오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물가는 말도 못하게 오르고, 정치계도 혼란스럽고, 나라 바깥은 아프가니스탄 사건과 더불어 각종 기후위기로 인한 홍수, 산불 등등으로 인해 모두 지독하게들 고생 중이다. 이 시절을 안전하게 건너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코로나 백신도 접종받았지만 여전히 의문스럽고 두려운 일투성이다. 마스크와 더불어 지낸 지난 2년 동안 머리만 하얗게 세어가고 있다. 너무 늦지 않게 염색이라도 좀 하고 명절을 맞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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