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이 10년 학대" 사기죄 기소된 '여자 잡스'의 물귀신 작전

중앙일보

입력 2021.09.14 08:00

엘리자베스 홈스와 그의 남편 윌리엄 에반스가 재판이 열리는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엘리자베스 홈스와 그의 남편 윌리엄 에반스가 재판이 열리는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실리콘밸리 최악의 사기극’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홈스(37) 전 테라노스 CEO가 사기죄로 재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홈스 측 변호인이 내놓은 변론이 화제다. 12일(현지시간) 미국 CNN 방송과 영국 BBC 방송 등에 따르면 홈스의 변호인은 “사업 실패한 게 범죄는 아니다”는 얘기와 함께 “홈스가 투자자를 설득할 때 ‘사실이라 믿은 것’을 얘기했을 뿐,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다”는 논리를 펼치며 무죄를 주장했다.

'피 한방울로 모든 것 바꾼다'던 여자 잡스

엘리자베스 홈스는 한때 ‘여자 스티브 잡스’로 불리며 실리콘밸리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2003년 19세의 나이에 홈스가 설립한 테라노스의 슬로건은 ‘피 한방울이 모든 것을 바꾼다’였다. 홈스는 자신이 개발한 메디컬 진단기트 ‘에디슨’을 이용하면 몇 방울의 피만 있으면 암을 포함한 250여 가지의 질병을 사전에 진단할 수 있고, 검사 비용도 50달러(약 5만8000원)수준으로 저렴하다고 홍보했다.

2015년 엘리자베스홈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포춘 글로벌 포럼에 연사로 참석해 발표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처럼 검정색 터틀넥을 입었다. 연합뉴스

2015년 엘리자베스홈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포춘 글로벌 포럼에 연사로 참석해 발표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처럼 검정색 터틀넥을 입었다. 연합뉴스

19세에 미국 명문대인 스탠퍼드대를 자퇴한 이력, 빛나는 금발머리와 푸른 눈, 중저음의 목소리에 잡스처럼 검정색 터틀넥을 즐겨입는 홈스의 모습에 투자자들은 일순간 매료됐다. 창업 10년여 만인 2014년, 테라노스의 기업 가치는 90억 달러(약 10조원)에 달했다. 하지만 2015년 월스트리트저널을 통해 테라노스의 기술에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한 순간에 몰락했다. 현재 홈스는 12가지의 사기 및 사기 공모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법조계에서는 유죄가 나올 경우 최대 징역 20년을 선고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벌금 및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별도로 진행될 전망이다.

엘리자베스 홈스의 재판 과정 스케치 모습. 연합뉴스

엘리자베스 홈스의 재판 과정 스케치 모습. 연합뉴스

12가지 사기죄로 기소…유죄 시 20년 징역

하지만 홈스 변호사 주장에 따르면, 테라노스를 창업하고 논란이 된 진단키트 에디슨을 직접 개발한 홈스가 정작 자기 기술의 진위 여부조차 전혀 모른 채 투자자 설득에 나선 것이 된다. BBC에 따르면 미국 형사재판에서 사기죄는 ‘거짓임을 알면서도 속일 의도를 갖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범죄로 성립된다. 실제 법원의 판단도 홈스가 사실을 알면서도 투자자에게 거짓말을 했는지, 테라노스 기술의 상용화 가능성을 믿었는지 여부에 따라 갈릴 것으로 보인다. 만약 홈스 변호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홈스는 무죄가 될 가능성도 있다.

변호인들은 당시 홈스가 거짓을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었던 근거로 ‘전 남자친구의 성적·정서적 학대’를 들었다. 홈스는 테라노스의 2인자이자 과거 연인이었던 라메시 서니 발와니로부터 10년간 학대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홈스가 법원에 제출한 문서에 따르면 “발와니는 내가 먹는 것과 잠자는 것, 의상 등을 통제했다”면서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와 e메일을 모니터링하고 자신에게 날카로운 물건을 던졌다”고 했다. 홈스의 변호인들은 “발와니의 학대로 인해 홈스는 심신미약 상태에 빠졌고 판단력을 잃은 상태에서 발와니의 조언에 따라 회사 일들을 결정했다”며 모든 책임을 발와니에게 떠넘겼다. 사실상 발와니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다는 얘기다. 같은 혐의로 피소된 발와니는 홈스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어처구니가 없다”며 부인했다.

엘리자베스 홈스(왼쪽)와 라메시 발와니가 테라노스 직원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인터넷 캡처]

엘리자베스 홈스(왼쪽)와 라메시 발와니가 테라노스 직원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인터넷 캡처]

'남친 학대로 심신미약'…무죄 주장

CNN은 홈스 측의 방어 논리가 “아주 전략적”이라고 봤다. 만약 발와니의 가스라이팅이 인정되면, 홈스에 대한 비판은 ‘2차 가해’ ‘피해자의 수치심 유발’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도 노렸다고 봤다. 또 변호인 측은 홈스가 최근 아들을 출산한 어머니란 점을 내세워 동정 여론을 일으킬 가능성도 높다. 그는 2019년 캘리포니아 에번스호텔의 후계자인 윌리엄 에번스와 비밀 결혼식을 올렸고 지난 7월 아들을 출산했다. 검찰은 변호인측 주장에 맞서 테라노스 사기극이 폭로된 뒤에도 홈스와 발와니가 다정하게 사랑을 주고받은 문자 내용 등을 공개해 반박했다. 또 설령 발와니의 학대가 있더라도 홈스가 명백한 거짓을 인식하는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맞붙었다.

2019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의 연방 법원에서 청문회를 마친 엘리자베스 홈스. 연합뉴스

2019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의 연방 법원에서 청문회를 마친 엘리자베스 홈스. 연합뉴스

홈스의 ‘마지막 일격’이 통할지는 배심원단의 판단에 달렸다. 열두 명의 배심원은 테라노스나 홈스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테라노스의 이야기를 다룬 WSJ의 취재기 ‘배드 블러드’를 읽지 않은 사람으로 선정됐다. CNN은 “배심원단이 홈스 스스로 인정한 ‘정신적 결함’을 신뢰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면서 “하지만 홈스가 ‘미투(ME TOO) 운동’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사법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방어에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홈스에 대한 재판은 오는 12월 중순까지 13주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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