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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엘리트 윤석열 대 구수한 윤석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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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형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형구 정치에디터

김형구 정치에디터

“잘 나도 너~무 잘 났다.”

손학규계로 꼽혔던 A의원과의 지난해 식사에서 ‘손학규의 실패’ 이유를 묻자 돌아온 답이다. KS(경기고-서울대) 출신, 최연소 보건복지부 장관, 민선 경기지사 등으로 승승장구했던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 한때는 기자들이 뽑은 가장 바람직한 대통령감 1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국민의 선택은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거악을 뿌리 뽑고 경제도 살리고 행복지수도 높여줄 유능한 지도자를 기대하면서 금수저보다 자신들과 동질감을 느끼는 흙수저에 표를 준다고 A의원은 얘기했다.

이력서는 최정상급이지만 권력의 정점엔 오르지 못한 또 하나의 대표적인 정치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서울대 법대 출신에 46세라는 역대 두 번째로 어린 나이의 대법관 임용, 문민정부 초대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 초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그도 끝내 정상에 서진 못했다.

윤, 정권 반기 든 이회창과 닮은 꼴
‘구수한 윤석열’ 캐릭터는 대조적
고발 사주 의혹 대응이 분기점될 듯

내년 대선을 앞두고 엘리트의 상징이랄 수 있는 서울대 법대 출신 예비후보들의 전성시대다. 더불어민주당에선 이낙연 후보, 국민의힘에선 박진·원희룡·윤석열·장기표·최재형(가나다순) 후보가 출마했다. 원칙주의자 이미지와 정치 입문 배경 면에서 이 전 총재와 가장 닮은 이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아닐까 싶다. 둘은 자신을 발탁한 살아있는 권력에 정면으로 맞선 공통점이 있다. 그 결기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던 윤 전 총장이 큰 고비를 만났다. 이른바 고발 사주 의혹이다. 강제 수사에 나선 공수처의 이례적 속도전, 언론 제보자 조성은 씨와 박지원 국정원장의 접촉 사실 공개 등 사건은 다이내믹하게 전개되고 있다. 만약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 윤 전 총장은 치명상을 입을 것이고, 그 반대라면 지지층 재결집의 도약대가 될 것이다.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10일 ‘국민 시그널 면접’에 참석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10일 ‘국민 시그널 면접’에 참석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실체적 진실과는 별개로 이번 사안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윤 전 총장이 엘리트주의로 읽힐 수 있는 발언을 한 점은 한번쯤 짚어볼 일이다. ‘정치인에게 악재는 어쩔 수 없지만 더 중요한 건 악재에 대응하는 태도’라는 건 정가의 오랜 금언이다.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상기된 얼굴로 “괴문서” “정치공작”이라며 격한 감정을 드러낸 건 억울함을 토로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인터넷 언론의 보도로 호들갑을 떨고 있다. 정치공작 하려면 다 아는 메이저 언론 통해서 했으면 좋겠다”는 발언은 오해를 낳을 만했다. 한국인터넷기자협회는 매체 규모와 명성을 공신력의 기준으로 삼는 듯한 언론관이라고 문제 삼으며 사과를 요구했다. 이후 윤 전 총장은 “규모가 작은 인터넷 매체를 정치공작에 동원하지 말라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는데, 처음부터 발언 취지를 정확하게 전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한때 ‘이회창 대세론’을 몰고 다닌 이 전 총재가 상고 출신 후보(김대중·노무현)에 연거푸 발목을 잡힌 패인 중 하나로 엘리트주의가 꼽힌다. 과거 기자 간담회에서 한 K대 출신 기자에게 “K대 나오고도 기자 할 수 있느냐”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한 얘기다. 훗날 농담이 와전됐다는 말도 나왔지만 ‘엘리트 본능’이 무의식중 드러난 사례로 전해진다.

물론 윤 전 총장은 이 전 총재와는 다르다. 구수한 인간적 면모로 빠르게 대중을 파고들었다. 서울대 법대 79학번 친구들이 윤 전 총장의 일화를 소개한 책 『구수한 윤석열』에는 대학 시절 술자리에서 두세 시간씩 ‘썰’을 푸는 수다쟁이였던 윤석열과 2차 사법시험을 사흘 앞두고 친구 함잡이를 위해 대구까지 내려간 윤석열 등 사람 좋아하는 보통 사람의 면모가 보인다. 공개석상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는 이른바 ‘쩍벌’ 행동이 논란이 되자 SNS에 반려견 ‘마리’가 다리를 벌린 채 엎드린 사진을 올리고, 초등학교 교통 자원봉사에 나섰다가 노란색 조끼가 터질 듯한 옆구리 사진을 SNS에 올려 ‘셀프 디스’에 나서기도 했다. ‘강골 검사’ 이력과는 또 다른 친근한 모습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도 적잖다.

“사람들은 대체로 ‘언더독’(이길 확률이 낮아 보이는 약자 후보)을 좋아한다”는 말은 정치에서 엘리트주의가 가질 수 있는 불리한 측면을 함축한다. 하지만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 명망 가문 케네디가(家)의 예에서 보듯 엘리트 프레임이 꼭 마이너스 요소인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윤 전 총장은 법조 엘리트 출신으로 살아있는 권력에 반기를 든 이력은 비슷하지만 캐릭터는 대조적인 이 전 총재와 같은 길을 갈까, 다른 길을 갈까. 고발 사주 의혹의 고비를 헤쳐나가는 과정이 분기점이 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