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채용시 신체검사, 국민건강검진으로 대체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이정희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이정희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3개월 계약직으로 취직하는데 4만원을 지출해 ‘채용 신체검사서’를 발급받아 제출하는 것이 맞나요.” 얼마 전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국민신문고에 올라온 민원이다. 몇 개월 일하는데 건강에 문제없다는 채용 신체검사 결과를 제출하라는 요구가 적절하냐는 불만이 담긴 내용이다. 이 민원은 최근 권익위가 채용 과정에서 구직자 부담으로 채용 건강진단을 하지 못하도록 고용노동부와 전국 행정·공공기관에 제도 개선을 권고한 실마리가 됐다.

2005년까지는 고용주가 직원을 뽑을 때 건강진단을 의무적으로 하도록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에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비용 부담에 대한 규정이 없다 보니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구직자가 비용을 부담해 채용 신체검사서를 제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제도는 고용기회 제한 등 부작용이 많이 지적돼 이후 폐지됐다.

청년들의 부담 덜어줄 개선 방안
공공이 선도하고 민간 동참해야

2015년 제정된  ‘채용 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은 구직자에게 채용 서류 제출 이외의 비용부담을 금지하도록 했다. 다만 공무원 채용 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후 2017년부터는 30인 이상 모든 사업장에 적용됐고 이를 어기면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그러나 이 규정은 결과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았다. 최근 권익위가 행정·공공기관 309곳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했더니 79.6%인 246개 기관이 채용하면서 여전히 구직자에게 3만~5만원을 부담시켜 건강검진 결과를 제출하도록 하고 있었다. ‘국민생각함’ 설문에서도 응답자의 67.3%가  “민간기업 취업 때도 관련 서류를 낸 적이 있다”고 답했다. 법과 처벌조항까지 있는데도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이에 권익위는 공무원을 제외한 직원을 채용할 때 건강검진 결과가 필요하면 고용주가 비용을 부담하고 구직자에게는 부담시키지 못하도록 인사규정 등을 고칠 것을 모든 행정·공공기관에 권고했다. 또 기간제 교원은 국가직 공무원과 같이 계약 종료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채용할 경우 검사를 면제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구직자에게 채용 서류 제출 외에 모든 금전적 비용 부담을 금지한 채용절차법 제9조(채용 심사비용의 부담 금지)에 ‘채용 신체검사 비용’도 포함된다는 내용을 관련 안내서에 명시해 확산하도록 고용노동부에 권고했다.

특히 고용주가 신체검사 비용을 부담하면 고용주의 부담이 커질 것으로 판단해 건강보험공단이 2년마다 시행하는 국가건강검진 결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행정·공공기관과 민간기업 등에 권고했다. 권익위는 건강보험공단이 내년 2월까지 건강검진 결과를 ‘채용 신체검사 대체 통보서’로 대체해 서비스할 수 있도록 협의를 완료했다. 대부분의 행정·공공기관은 권익위의 권고를 수용해 내년부터는 행정·공공기관 취업 시 구직자가 비용을 부담해 신체검사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질 전망이다.

향후 민간부문까지 국가건강검진 결과를 활용하면 연간 86만여 명이 혜택을 볼 수 있고 매년 260억 원가량의 비용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현재 42%에 불과한 20~30대의 건강검진 수검률도 높아져 국민의 건강증진에도 기여할 것으로 예상한다. 일거양득(一擧兩得)의 효과가 기대되는 셈이다.

청년 실업률이 치솟는 등 취업난이 심각한 가운데 코로나19로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청년뿐 아니라 많은 국민이 힘들고 팍팍하게 생활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국민 부담을 덜어주기는커녕 법과 규정을 무시하고 구직자에게 채용 신체검사 비용을 부담시켜서야 안 될 일이다. 더 이상 이런 불합리한 제도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공공부문부터 나쁜 관행을 근절하고 개선안이 정착되도록 앞장서야 한다. 국민 부담과 불편을 덜어주는 제도 개선 방안이 하루빨리 민간부문까지 확산되길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