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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호정의 왜 음악인가

어려운 음악의 쓸쓸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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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호정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호정 문화팀 기자

김호정 문화팀 기자

이 음악의 연주가 어려운 이유를 밤새 꼽을 수 있다. 심하게 많은 스타카토, 한 음을 여러 번 두드리는 연타, 손이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도약, 음향은 크고 작음을 오간다. 올림(#)과 내림(♭)의 계속되는 교차도 피아니스트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작품의 제목은 ‘스카르보(Scarbo)’. 낭만주의 시인인 베르트랑(1807~41)의 시에 나오는 말썽꾸러기 요정의 이름이다. 작곡가는 모리스 라벨(1875~1937). 그가 베르트랑의 시 ‘밤의 가스파르’로 쓴 세 곡 중 마지막이다. 이 곡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이달 7일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독주회에서 연주하며 화제가 됐다. 손꼽히는 난곡을 손쉽게 연주했기 때문이다.

라벨은 이 작품을 작심하고 어렵게 썼다. ‘어려운 피아노 작품’의 대명사인 프란츠 리스트의 전통을 잇고자 했다. 또 당대에 가장 어려운 작품으로 꼽혔던 발라키예프(1837~1910)의 ‘이슬라메이’(1869년 곡)보다 더 어려운 곡을 쓰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이 작품은 20세기 들어 기량이 부쩍 발전한 피아니스트들의 단골 연주곡이 됐다. 물론 속 시원할 정도로 완벽하게 연주하기는 쉽지 않지만 말이다.

똑같은 음을 두드리며 시작하는 ‘스카르보’의 악보 일부.

똑같은 음을 두드리며 시작하는 ‘스카르보’의 악보 일부.

무지막지한 난곡이지만 과시가 요점은 아니었다. 라벨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수많은 선배처럼 열 살도 되기 전에 주목받았던 신동이 아니었고, 아카데믹한 곡을 쓰지 못한다고 비난받고는 했다. 선배인 드뷔시는 라벨의 뚜렷하고 쨍쨍한 색채가 괴상하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당시 잘 나가는 작곡가들의 ‘면허’와도 같았던 로마 대상(Grand Prix de Rome, 프랑스 예술원 주관)을 수상하지 못하면서 관료주의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전통적 합창곡인 ‘칸타타’를 써내기로 하고는 세속적 춤곡인 왈츠로 채운 라벨의 악보에 심사위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라벨이 로마 대상에서 탈락한 때가 1901~1905년, ‘스카르보’ 작곡은 1908년이다. 광적으로 어려운 기술의 바탕에 소외와 분노가 있다. 그의 삶은 이후로도 평탄하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건강을 잃었고, 미국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한 뒤 정신이상을 겪게 돼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돼 수술을 받은 뒤 사망했다. 프랑스의 젊은 음악가들은 라벨의 음악이 기계적이라며 외면했다.

라벨은 50년 조금 안 되는 시절 동안 100여 곡을 작곡했다. 과작(寡作)이다. 작곡을 힘들어하고 편수가 적다는 점에 자괴감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볼레로’ ‘라발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같은 다시 없을 히트곡으로 라벨은 기억된다. 자신의 시대에 어렵게 버텼던 혁신가의 생애다. ‘스카르보’의 기술적 난이도가 단지 신기한 데에 그치지 않고 울림을 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