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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자 설득해 백신 개발…흙수저 부부의 '99조 신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세계 최대급 제약회사인 화이자 부사장은 지난해 1월, 독일의 한 무명 바이오테크 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 전화를 받았다. 내용인즉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같이 개발해보자”는 것. 전화를 받은 이는 화이자 부사장이자 백신개발 수석책임자인 필 도르미처 박사였다. 그는 이 무명 기업인 겸 과학자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전화를 걸었던 이는 우구르 사힌(56) 박사. 당시엔 무명이었지만 지금 그의 회사, 바이오엔테크의 가치는 화이자 부럽지 않다. 바이오엔테크는 사힌 박사가 아내 위즐렘 튀레지(54) 박사와 함께 2008년 창업했다. 이들 부부 과학자는 결국 9개월만에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바이오엔테크의 성공 스토리도 화이자 등의 수많은 거절을 딛고 쓰여진 셈이다. 사힌 박사가 지난 11일(현지시간) 영국 텔레그래프와 화상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순탄치만은 않았던 스토리를 털어놨다.

무증상 감염 7살 소녀 사례 보고 팬데믹 확신 

지난 3월 악셀 스프링거 시상식에 참석한 우구르 사힌(왼쪽) 박사와 위즐렘 튀레지 박사 부부. AP=연합뉴스

지난 3월 악셀 스프링거 시상식에 참석한 우구르 사힌(왼쪽) 박사와 위즐렘 튀레지 박사 부부. AP=연합뉴스

사힌 박사 부부는 살아있는 흙수저 신화다. 두 사람 모두 터키 이주노동자 가정 출신이다. 이들은 지난해 1월 한 논문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 논문의 핵심은 코로나19가 사람 간 전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 규명했다는 것이었지만, 두 부부 과학자는 다른 면에 주목했다. 논문에 등장한 무증상 감염 7살 소녀였다. 사힌 박사의 머릿속엔 ‘코로나19 감염 사실도 모른 채 항공 여행을 하며 세계에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무증상 감염자들’이 떠올랐다.

그는 텔레그래프에 “암 환자들도 뒤늦게 발병 사실을 알게 되듯,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이미 암세포처럼 전이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며 “코로나19가 팬데믹이 되리라 확신했다”고 말했다. 부부는 당장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기로 했다.

지난 4월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사힌 박사와 튀레지 박사 부부를 그린 그래피티. AFP=연합뉴스

지난 4월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사힌 박사와 튀레지 박사 부부를 그린 그래피티. AFP=연합뉴스

화이자의 필 박사는 왜 거절했을까. 그는 사힌 박사에게 “바이오엔테크가 보유한 mRNA(메신저리보핵산) 기술로 백신을 만든 전례가 없었던데다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처럼 코로나19 역시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상이 적중한 쪽은 필 박사가 아닌 사힌 박사였다. 결국 사힌 박사는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고, 필 박사는 이번에는 "예스"를 했다.

곡절 끝 개발된 화이자-바이오엔테크 백신은 120여 개국에 14억 도즈가 팔렸다. 중국 자체 백신을 제외한 세계 최다 물량이다. 무명이었던 바이오엔테크는 850억 달러(약 99조9600억원) 규모의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 연애부터 결혼, 창업부터 코로나19 백신 개발까지 이들 부부의 이야기는 조 밀러 기자가 이들의 도움을 받아 곧 출간하는 저서 『백신』에서 자세히 소개한다.

“부스터샷은 필요…목적 따라 시기 조절”

이 백신은 바이러스의 유전정보가 담긴 mRNA를 사람 몸에 주입해 체내에서 항원(바이러스 단백질)을 만들도록 하는 원리다. 실제 바이러스를 주입하지 않아 감염 위험이 없고, 변이가 발생하더라도 유전정보만 알면 단기간에 새로운 백신을 대량 생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쉬운 길은 없다”고 경고한다. 모든 새로운 질병이나 바이러스는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튀레지 박사는 “표적(바이러스)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해야 어떤 정보를 넣을지 알 수 있다”며 “그것이 바로 혁신”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8월 앙겔라 마르켈(맨 왼쪽) 독일 총리가 바이오엔테크사를 방문했다. AFP=연합뉴스

지난 8월 앙겔라 마르켈(맨 왼쪽) 독일 총리가 바이오엔테크사를 방문했다. AFP=연합뉴스

부스터샷 접종은 필요하다는 게 사힌 박사의 입장이다. 미국 국립 알레르기ㆍ전염병 연구소(NIAID)의 안토니 파우치 박사는 최근 “세 번째 백신 접종은 부스터샷이 아니라 코로나19 백신 표준 처방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부인인 튀레지 박사는 “모든 바이러스는 어떤 시점에서는 분명히 어느 정도의 증폭은 필요하기 때문에 의미 있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부스터샷의 목적이 코로나19 감염을 줄이는 것이라면 더 일찍 접종하고, 중증이나 입원을 막기 위해서라면 훨씬 더 늦게 맞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 백신의 성공으로 이들 부부는 꿈에 가까이 다가서게 됐다. 사힌 박사는 “코로나 백신으로 벌어들인 돈은 말라리아 등을 치료하는 신종 백신 개발에 투자하고 싶다”고 말했다. “말라리아는 어린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최악의 전염병”이라면서다. 암 치료 백신 가능성도 신중하지만 언급했다. 인공지능(AI)이나 로봇공학 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악성종양에 대해 개인화된 백신이 가능하다는 전망이다. 사힌 박사가 “앞으로 5년 안에는 개인화된 암 mRNA 백신이 출시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자, 튀레지 박사도 “흥미로운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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