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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 붉게 물들면 3년내 말라 죽는다…오대산 침엽수의 비명 [영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3일 강원도 평창 오대산 두로령 등산로. 해발 1300m 지점을 지나자 회색빛을 띤 앙상한 나무가 나타났다. 높은 산지에 무리 지어 자라는 소나무과 침엽수 '분비나무'다.

약 10m인 키를 봤을 때 50년 정도 산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반백 년을 버텼던 나무는 1년 전쯤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폭염에 시달린 나무들이 스트레스로 죽어가는 모습이다. 오대산에서도 침엽수의 떼죽음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 스트레스를 받은 분비나무가 붉게 물든 모습. 자료 녹색연합

기후 스트레스를 받은 분비나무가 붉게 물든 모습. 자료 녹색연합

온난화에 오대산 나무 말라죽는다

이날 중앙일보 취재진은 녹색연합·국립공원연구원과 오대산 두로봉을 동행 취재했다. 분비나무가 집단 고사한 현장을 확인하고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지난해 방문한 한라산은 기후변화로 인해 구상나무 고사가 진행 중이었다. 남쪽과 북쪽, 산을 가리지 않고 침엽수가 위기에 빠진 것이다.

초록빛을 잃어가는 오대산 분비나무를 하늘에서 본 영상. 자료 녹색연합

초록빛을 잃어가는 오대산 분비나무를 하늘에서 본 영상. 자료 녹색연합

두로령 정상에 있는 분비나무 군락지엔 나무 수십 그루가 잿빛 모습으로 서 있거나 쓰러져 있었다. 살아 있는 분비나무는 바늘 모양의 뾰족한 초록 잎이 무수히 붙어 있고, 아이 팔뚝만 한 열매가 난다. 하지만 이곳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분비나무 절반은 이파리가 모두 떨어져 있었다. 살아있는 나무들도 대부분 잎 개체 수가 적거나 그마저도 붉게 물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평균 수명 100년이 넘는 분비나무가 이토록 한 번에 죽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분비나무가 죽어가는 건 기후위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지구 온난화로 겨울에 쌓인 눈이 빨리 녹아 봄철 수분 공급이 줄고, 여름철 반복된 폭염에 노출되면서 나무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게 국립공원연구원의 설명이다. 이른바 '기후 스트레스'가 나무를 서서히 말려 죽이는 것이다.

지난 3일 오대산 아고산대에 말라 죽은 분비나무가 서 있다. 편광현 기자

지난 3일 오대산 아고산대에 말라 죽은 분비나무가 서 있다. 편광현 기자

3단계 거쳐 생명 잃게 되는 침엽수

침엽수 고사는 3단계로 진행된다. 기후 스트레스가 누적된 나무는 잎이 급격히 떨어지는 초기 증상을 겪는다. 이후 중기 증상으로 얼마 남지 않은 잎들이 붉게 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다 결국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침엽수는 생명을 잃는다.

붉은 잎이 나타난 나무는 대개 2~3년 안에 모두 죽는다는 게 백두대간 아고산대(고산대와 저산대의 사이로 침엽수가 많은 지대)를 수년간 관찰한 녹색연합의 결론이다. 서재철 전문위원은 "붉은 잎이 보인 나무는 천천히 죽어간다. 고사가 진행된 나무 중 회복한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국립공원연구원도 기후위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고사를 막을 방법은 없다고 본다. 김진원 연구원은 "(죽어가는 나무들이) 자연적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침엽수가 모두 고사할 때를 대비해 고지대에서 유전자원을 확보하고 복원 증식 기술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태백산 침엽수가 말라죽은 모습. 자료 녹색연합

태백산 침엽수가 말라죽은 모습. 자료 녹색연합

오대산 아고산대에는 '깃대종'(한 지역 생태계를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생물)인 분비나무만 있지 않다. 잣나무·전나무·주목 등 다양한 침엽수가 자생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이들 침엽수 모두에서 잎이 붉게 물들거나 급격한 속도로 떨어지는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녹색연합에 따르면 오대산 아고산대 침엽수 3분의 1가량이 회색빛을 띠면서 죽은 상태다. 단순히 특정 종만의 위기가 아니라 오대산 모든 나무가 위험하다는 뜻이다.

지리·태백·설악·한라산도 위기 진행

기후 변화에 따른 침엽수 고사 현상이 목격되는 건 오대산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백두대간에 자리 잡은 지리산·태백산·설악산과 한라산 등 국내 전역에서 침엽수가 죽어가고 있다. 2013년 한라산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알려진 구상나무가 죽어간다는 사실이 태풍 피해를 계기로 처음 알려졌다.

그 후 2016년엔 지리산 구상나무, 설악산 분비나무가 각각 죽어가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에는 지리산·덕유산·계방산에서 가문비나무 집단 고사가 목격됐다. 잣나무와 전나무, 소나무, 주목을 더해 한국 대표 침엽수 7종이 모두 기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이다.

지리산 침엽수가 말라죽어 하늘에서 봤을 때 하얗게 보인다. 자료 녹색연합

지리산 침엽수가 말라죽어 하늘에서 봤을 때 하얗게 보인다. 자료 녹색연합

특히 전 세계를 통틀어 한반도에만 있는 구상나무·가문비나무는 멸종 위기에 처했다. 녹색연합에 따르면 한라산과 지리산에 있는 구상나무의 90%가 이미 고사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위기에 빠진 침엽수들을 별도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녹색연합은 백두대간 아고산대 침엽수의 고사 실태를 전수 조사하고 산림청·국립공원공단의 기후위기 대응 조직도 확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재철 전문위원은 "기후 위기로 죽어가는 나무들을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하고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이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고, 만약 죽더라도 다른 종이 멸종 위기를 겪을 때 시금석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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