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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각자도생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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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태인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박태인 JTBC 기동이슈팀 기자

박태인 JTBC 기동이슈팀 기자

재난지원금을 받지 못해 억울하단 목소리가 들린다. 대한민국 12%에 들었다는 사실에 씁쓸하지만 “잘 살아왔구나”란 생각이 스쳤다는 사람도 있다. 인터넷에선 건강보험료 기준을 초과해 재난지원금을 받지 못한 이들을 ‘6두품’이라 부른다. 그런 월급쟁이들이 ‘세습 중산층’에 속했다고 분석한 책도 있다. 『세습 중산층 사회』를 쓴 조귀동은 오늘날 청년세대가 경험하는 불평등의 핵심은 상위 10%와 남은 90%의 격차라 설명한다. 한국 사회는 중산층이란 계급마저도 대물림되는 불평등한 사회다. 12%의 기준을 부정하긴 어려운 측면도 있다.

나는 재난지원금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일상은 왜 이리 불안한 걸까. 전세를 벗어나지 못한 23년 차 직장인이 겪는 정리해고를 다룬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를 정주행했다.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는 중년의 이야기에 왜 6년 차 직장인인 내가 공감을 하는 건지. 9개월 앞으로 다가온 전세 계약은 반드시 연장돼야 하는데, 선택지가 없던 드라마 속 인물들이 또 한 번의 대출 심사를 앞둔 내 미래 같았다.

재난 지원금을 받지 못한 이들도 내 집 마련의 꿈에 작별 인사를 한 지 오래다. 지난달 서울 중구 남산서 바라본 도심의 모습. [뉴스1]

재난 지원금을 받지 못한 이들도 내 집 마련의 꿈에 작별 인사를 한 지 오래다. 지난달 서울 중구 남산서 바라본 도심의 모습. [뉴스1]

“이렇게 벌어서 집 한 채도 못 사는데, 사명감만으로 일할 순 없어”, 공무원 친구가 퇴직을 언급하며 꺼낸 말이다. “성장하는 회사로 가겠다”며 나를 물 먹이던 기자는 이 업계를 떠났다. 모아놓은 돈을 쏟아부어 ‘이과 세탁’을 하겠다고 퇴사한 문과 출신도 여럿이다. 이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기 시작했다. 재난지원금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도 아파트 청약만이 내 집을 가질 유일한 기회다. 하지만 ‘특별’과 ‘공공’의 자격을 얻지 못해 국가나 회사를 믿기보단 각자도생을 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깔려있다. 올해 공인받은 12%의 자리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 한다는 것. 입시와 취업 경쟁을 통과해 한숨 돌렸단 생각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 모든 것을 깨닫기 시작한 순간이다.

재난지원금을 받지 못한 이들을 기득권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불평이란 것이다. 하지만 25만원 때문에, 혹은 “자부심을 돌려드린다”는 국무총리의 말 한마디 때문에 그들이 화가 난 것만도 아니라 생각한다. 영끌로도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려운 허탈감. 평생직장이 사라졌다는 두려움. 미래에 대한 막막함은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미국 탐사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2005년 몰락하는 화이트칼라를 다룬 『희망의 배신』이란 책을 썼다. 그 책에는 자신을 ‘시름시름 죽어감(Fading Away)’이라 표현한 중산층들이 등장한다. 세월을 걸쳐 하향이동하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수많은 삶. 워싱턴포스트는 “성적과 성취를 믿는 사람들이 버려지는 세계”라 표현했다. 모두가 제 살길을 찾기 시작했다. 각자도생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