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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대 曰] 한국전쟁이 ‘미중 전쟁’ 둔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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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호 30면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한국전쟁을 ‘미중(美中) 전쟁’으로 부를 수 있을까? 미국과 중국이 격돌하는 신냉전 개념이 71년 전의 6·25 전쟁마저 빨아들이고 있다. 오늘의 시각으로 과거의 냉전을 재해석하는 가운데 ‘역사 왜곡’이 자행되기도 한다. 최근 한국 상영을 둘러싸고 논란을 빚은 중국 영화 ‘1953 금강 대전투’(원제 ‘금강천’)는 한 사례로 보인다.

6·25 전쟁을 남한과 북한 사이의 내전이라고만 알고 있던 사람은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는 한국군과 북한군이 나오지 않고 미군과 중공군 사이의 전투로만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신냉전 시대 최전선 ‘한반도 현실’ 확인
중국 영화 ‘금강천’ 소동이 남긴 역설

6·25 전쟁은 본래 내전과 국제전의 성격이 섞여 있었다. 3년의 전쟁 기간에 남한과 북한의 무수한 군인과 민간인이 살상되며 전면전을 치렀다는 점에서 보면 내전이다. 동시에 미소(美蘇) 두 강대국이 맞선 냉전 시대 최초의 열전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국제전이었다. 소련-중국-북한의 사회주의 ‘삼각 동맹’의 침략에 맞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 측 16개국이 참전했다.

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되는 해인데, 이를 가장 뜨겁게 기념한 것은 중국 정부였다. 중국에선 자신들이 참전한 10월 25일을 기념일로 삼는다. 지난해 10월 23일 70주년 기념식에서 시진핑 주석이 직접 나서서 6·25 전쟁에 대해 ‘미 제국주의’에 맞선 ‘정의의 승리’였다고 규정했다. 중국 최고지도자가 한국전쟁 참전 기념행사에서 직접 연설을 한 것은 20년 만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이 매우 공격적이었다. 지난 20년 동안은 중국이 미국과 서방에 문호를 개방하고 경제개발에 매진하던 시기였기에 민감한 정치적 이슈를 겉으로 내세우지 않았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막을 내리기 전까지 동유럽에선 6·25 전쟁이 내전이며 남한의 북침으로 시작되었다는 선전이 통용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6·25 전쟁 관련 소련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비로소 전쟁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핵폭탄 실험에 성공하며 자신감을 키우고, 1950년 1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면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은 한국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가장 중요한 행위자였으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숨겼다. 빨리 끝날 수도 있었던 전쟁을 3년이나 끌어 희생이 늘어난 배경에도 소련의 계략이 있었다. 이런 사실을 밝혀내는 데는 중국 출신 학자들도 기여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바람이 부는 가운데 더는 소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라고 불러왔다. ‘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도운 전쟁’이란 뜻이다. 기념식에서 시진핑은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북한을 원조하기 위한 전쟁에서의 위대한 승리는 중국 민족의 역사와 인류 평화, 발전의 역사에 영원히 새겨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침략’이란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38선을 통과해 북진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마오쩌둥이 스탈린, 김일성과 긴밀히 한국전쟁을 모의한 사실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영화 ‘금강천’, 드라마 ‘압록강을 넘어’, 다큐멘터리 ‘항미원조전쟁’ 등이 중국 정부의 지원 아래 지난해 집중적으로 제작됐다. 신냉전 격화에 대비한 ‘내부 단속’으로 보인다. 오는 30일 중국에선 영화 ‘장진호’가 개봉된다. 최근 중국 정부가 대중가요 유통까지 규제하는 시대착오적 ‘사상 통제’도 그런 내부 단속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영화 ‘금강천’의 한국 상영과 취소 논란은 역설적으로 한국이 처한 냉엄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냉전 시대에 그랬듯이 신냉전 시대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두 강대국 간 이념 대결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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