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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정치인의 선택, 유권자의 선택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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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호 31면

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정치에디터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지금의 부모를 만난 것도 나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성인이 되면서 자기 결정권을 갖게 된 뒤로는 직장·결혼에 내 집 마련까지 매 순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다. 선택은 또 다른 파장을 낳는다. 무인도에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닌 이상 각자의 선택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기업인의 선택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듯 정치인의 선택은 유권자의 선택을 받게 된다. 정치에 뛰어들겠다는 것도, 대선 출마를 결심하는 것도 모두 선택이다. 그리고 유권자는 이들을 표로 선택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선택은 ‘여럿 가운데서 필요한 것을 골라 뽑음’이라고 정의돼 있다. 지극히 가치중립적인 단어다. TV 예능 프로에서 사회자가 “최종 선택은 누구~”라고 외칠 때 시청자들은 합리적·이성적 판단과 고민의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최근 2~3년 새 한국 사회에서는 선택이란 단어가 부정적 의미로 곧잘 쓰이기 시작했다. 선택적 정의, 선택적 법치, 선택적 수사, 선택적 분노 등과 같은 용어가 잇따라 논란의 화두로 떠오르면서다. 그 바탕엔 자의적·의도적·이기적 동기가 깔려 있다는 지적도 빠지지 않는다.

정치적 결정엔 책임 따르기 마련
최종 선택은 결국 유권자들의 몫

여기에 이번 주엔 ‘고발 사주’ 의혹을 둘러싸고 선택적 기억이 추가됐다.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이 SNS의 유행어가 된 바로 그 회견에서다. 이에 더해 유력 대선주자는 ‘메이저’라는 기준을 제시하며 앞으로 의혹을 제기할 언론까지 취사선택해 주는 친절함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히 선택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모습이다. 일찍이 선택적 부각(highlighting)과 선택적 은폐(hiding)의 폐해를 지적했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도 이처럼 선택이란 단어가 ‘선택적’으로 ‘선택’되는 한국 사회의 왜곡 현상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겠다 싶을 정도다.

선택이 선택다우려면 남들이 보기에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공인의 선택은 무엇보다 공정성이 생명이다. 과정이 공정하고 결론이 합리적이어야 제대로 된 선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정치권은 어떤가. 사적 이익을 기준으로 선택하고 이를 공정과 대의로 포장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여론을 제멋대로 호도하는 이 같은 행태는 한국 정치가 올곧고 바른 정치(正治)는커녕 사사로운 정실에 얽매인 정치(情治)의 수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선택의 중요성은 대선 정국에서 더욱 부각된다. 어느새 대선이란 바둑판도 이런저런 선택이 가능했던 예선 리그를 지나 한번 삐끗하면 곧바로 탈락하는 토너먼트로 향하고 있다. 더욱이 곧 초읽기에 몰리게 되면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격언을 몸소 체험하게 될 터다. 대선판은 동네 바둑과 달리 낙장불입이라 수를 물릴 수도 없다. 그런 만큼 다음 수를 내다보지 못한 채 당장의 위기만 면하려고 계속 강수만 두다가는 자칫 자충수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큰 형국이다. 드디어 대선주자들의 내공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시점이 다가온 셈이다.

선택은 자유지만 결정엔 늘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고심 끝에 내린 선택이 신의 한 수가 될 수도 있지만 잘못된 선택에 정치 인생 자체가 꼬일 수도 있다. ‘고발 사주’ 논란에서도 누구는 회피를 선택했고 누구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이젠 유권자가 선택할 차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에 대한 최종 선택은 오로지 투표권을 가진 우리 유권자들의 몫이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박신홍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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