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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대사 환영, 마오가 더 기뻐해” 저우언라이 전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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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93〉 

1946년 말, 중국에서 철수하는 미군 군조처 요원들. [사진 김명호]

1946년 말, 중국에서 철수하는 미군 군조처 요원들. [사진 김명호]

스튜어트는 성실한 교육자이며 성직자였다. 대를 이어 50년간 중국에서 봉사했다. 얼떨결에 중국 대사직 맡는 바람에 중국에서 쫓겨났다. 스스로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진 한편의 코미디였다”는 말을 자주했다.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중국의 국·공 분쟁에 골머리를 앓았다. 1945년 12월 15일, 6년간 육군참모총장 역임한 조지 마셜을 특사로 낙점했다. 마셜은 버지니아주 리스버그의 농장에서 만년을 즐기려던 계획을 접었다. 모셔뒀던 원수 복장 입고 중국으로 떠났다. 국민정부 배도(陪都) 충칭(重慶)과 중공 근거지 옌안(延安)을 오가며 조정에 나섰다. 3주 만에 국·공 쌍방이 정전에 합의했다. 이듬해 3월 27일, 전운이 감돌던 동북지역의 정전협정 서명도 받아냈다. 마셜은 중국과 중국인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남의 간섭 받기 싫어하고, 남의 일에 끼어들기 귀찮아 한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보고차 워싱턴으로 갔다. “임무 완성이 임박했다”며 허리를 폈다.

마셜, 중국으로 날아가 국·공 정전 이끌어

소년 시절 부모 형 제와 함께한 스튜어트(왼쪽 셋째). 1890년 저장성 항저우(杭州). [사진 김명호]

소년 시절 부모 형 제와 함께한 스튜어트(왼쪽 셋째). 1890년 저장성 항저우(杭州). [사진 김명호]

협정문은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마셜이 자리를 비우자 전쟁이 터졌다. 국민당군이 중공의 동북민주연군에 공격을 퍼부었다. 겉으론 민주와 평화를 노래하고 뒤로는 전쟁을 준비하던 중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초청에 응했다. 황당한 소식을 접한 마셜은 당황했다. 황급히 중국으로 돌아왔다. 양쪽을 어르고 달랬다. 1개월간 정전을 성사시켰다.

4월 하순 스튜어트가 상하이에 나타났다. 볼일 보고베이핑(北平)행 비행기에 탑승할 무렵 비서가 달려왔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위원장이 보낸 전용기가 대기 중이다.” 장은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함께 사저에서 스튜어트를 만났다. 동향 사람 만나기가 너무 힘들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두 사람은 저장(浙江)성 출신이었다. 저장 방언으로 얘기꽃을 피웠다. 무슨 말인지 몰라 지루해하던 쑹이 영어로 끼어들었다. 스튜어트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쑹메이링이 마셜을 만나보라고 권했다. 중국의 운명에 관심 많은 5성장군이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동했다. 쑹의 주선으로 만난 마셜은 정전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합의 며칠 후 전쟁을 일으킨 중국 지도자들은 국제사회에 동참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며 자문을 청했다. 나는 부르면 언제건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장제스(중간)와 스튜어트(오른쪽). 왼쪽은 소련대사. [사진 김명호]

장제스(중간)와 스튜어트(오른쪽). 왼쪽은 소련대사. [사진 김명호]

당시 미국의 주중대사는 공석이었다. 마셜은 스틸웰과웨드마이어를 놓고 저울질했다. 스틸웰은 모범적인 직업군인이었다. 태평양전쟁 시절 연합군 중국전구사령관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버마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군용물자를 공산당이 이끄는 8로 군과신4군에도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며 장과 충돌이 빈번했다. 국민당 군대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후임 웨드마이어는 성격이 원만한 반공주의자였다. 장은 웨드마이어가 맘에 들었다. 마셜에게 중국대사로 추천했다. 소문이 나자 중공과 자칭 민주인사들의 반대가 물 끓듯 했다. 국·공 연합정부 수립을 구상하던 마셜은 제3의 인물을 물색했다. 미국 전역을 뒤져도 국·공양당이 동의할 인물은 스튜어트 외에는 없었다. 트루먼에게 스튜어트를 천거했다.

베이핑에 돌아온 스튜어트는 옌칭(燕京)대학 일에만 전념했다. 자주 만나자던 마셜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2주일 후 난징에서 만나자며 전용기를 보냈다. 스튜어트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마셜의 첫마디가 심상치 않았다. “선생은 중국에서 태어났다. 50년간 생활하며 완전히 중국화 됐다. 미국인들은 선생을 중국인으로 대한지 오래다. 중국과 미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나도 생각하겠다. 시간이 없다. 모레 다시 만나자.”

미군 떠나자 동북 지역 피비린내 진동

정전 협상 중인 동상이몽의 세 사람. 왼쪽부터 국민당 비서장 장췬(張群), 미 대통령특사 마셜,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저우언라이. 1946년 1월 11일 충칭. [사진 김명호]

정전 협상 중인 동상이몽의 세 사람. 왼쪽부터 국민당 비서장 장췬(張群), 미 대통령특사 마셜,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저우언라이. 1946년 1월 11일 충칭. [사진 김명호]

이틀 후, 마셜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대통령의 특사일 뿐이다. 중국은 있을수록 생소한 나라다. 중국을 잘 알고, 아는 사람도 많은 선생이 대사직을 맡아주기 바란다.” 스튜어트는 손사래를 쳤다. “그간 교육과 복음전파에만 주력했다. 정치 외교는 문외한이다. 나이도 70줄에 들어섰다. 건강에 자신이 없다. 학교 일도 태산 같다.” 마셜은 막무가내였다. 열흘 후 스튜어트에게 통보했다. “담판이 파열됐다. 양측이 전쟁 준비를 갖췄다. 트루먼도 내 제안에 동의했다. 상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옛 친구라며 반대하지 않았다.” 중공의 반응을 우려하자 마셜은 웃기만 했다. “은밀히 탐문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이튿날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스튜어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환영한다. 그간 일부 미국인들은 국민당에게만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중국인의 손을 빌려 중국인을 살해했다. 선생은 공평한 사람이다. 마오(毛·모) 주석은 나보다 더 선생의 부임을 기뻐했다.” 스튜어트는 저우의 예리한 지적에 등골이 오싹했다.

베이핑에는 미군 수십 명이 협화의원에 군사조사처(軍調處) 간판 걸고 상주하고 있었다. 중공과 자주 충돌했다. 미군은 부상자가 속출하자 철수시켰다. 미군이 자취를 감추자 동북에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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