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탄 조달 목적? 사업 ‘쪼개기’로 기존 주주가치 훼손 우려

중앙선데이

입력 2021.09.1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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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호 14면

대기업 분할 후 자회사 상장 논란

직장인 이모(45)씨는 8일 현대중공업 기업공개(IPO) 공모 청약을 신청했다. 이씨는 지난 2017년부터 현대중공업의 주식을 갖고 있었으나 2019년 이 회사의 물적분할(분리·신설한 회사의 주식을 모회사가 100% 소유하는 기업분할 방식)로 보유 중이던 주식이 한국조선해양으로 바뀌었다. 이씨는 “핵심 사업을 떼어내 새로 상장한다고 하니 가만히 앉아 있다가 주식을 바꿔치기 당한 기분”이라며 “한국조선해양은 물적분할 이후 주가가 빠졌을 때 손절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의 코스피 상장(17일)을 앞두고 물적분할한 후 자회사를 상장하는 이른바 ‘쪼개기 상장’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물적분할은 그동안 부실 사업이나 합작 투자 등을 위한 기업 분할 목적이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대기업이 대규모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법상 문제는 없지만 모회사에 투자한 일반 투자자의 손실이 뒤따를 수 있어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안상희 대신경제연구소 책임투자센터장은 “현대중공업처럼 물적분할 후 자회사를 상장시키면 기존 주주는 주가 하락을 경험하는 등 피해를 입게 된다”고 말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현대중공업의 물적분할은 2019년 초 KDB산업은행과 체결한 대우조선해양 인수 계약 선행 조건이었다. 대우조선해양 인수 자금 확보를 위해 자본은 대부분 존속회사(모회사)인 한국조선해양이 갖고, 부채는 신설회사인 자회사 현대중공업이 떠안았다. 곳간이 빈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친환경 선박 개발 등에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다며 IPO를 결정했다. 현대중공업은 상장을 통해 1조원대의 자금을 조달한 뒤 빚도 일부 갚고, 차세대 선박 연구·개발도 하겠다고 밝혔다. 물적분할 후 상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는 대기업은 현대중공업 만이 아니다. 만도는 1일 자율주행 사업 등 성장 사업을 물적분할해 만도모빌리티솔루션즈 출범시켰다.

SK이노베이션은 7월 성장성이 큰 배터리 사업을 물적분할키로 했다. 앞서 지난해에는 LG화학이 배터리 사업을 떼어내 신설회사 LG에너지솔루션을 출범시켰다. 물적분할 회사들의 다음 수순은 상장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연내 상장을 목표로 6월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했다. 증권정보업체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8월 말 기준 지난 3년간 20대 그룹 계열사 가운데 16곳이 상장했다. 이 덕에 20대 그룹의 시가총액은 967조3126억원에서 1504조2597억원으로 55.5% 늘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이 같은 물적분할 후 상장으로 개인 투자자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우려한다. 모회사의 성장동력을 약화하는 요인이어서 주가 하락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6일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SK이노베이션의 물적분할이 주주자본주의를 해친다’는 취지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청원인은 “배터리 부분만 따로 떼어 내 기존 주주들의 뒤통수를 치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SK이노베이션 주가는 배터리 분할 계획을 공식 발표한 7월 1일 9% 가까이 빠졌다. 6월 30일 29만5500만원(종가 기준)이었던 이 회사의 주가는 현재 25만원 선에 머물러 있다.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대표는 “쪼개기 상장은 소액 주주들에게 손해인데 현행법에서는 규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유상증자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도 있지만 그룹 오너의 지배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며 “물적분할 후 상장은 그룹 오너의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손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꼬집었다. 현대중공업만 해도 정몽준 회장 일가의 지배력에는 변화 없이 1조원대 자금을 수혈하게 됐다.

그러나 차세대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글로벌 배터리 업체의 설비 경쟁으로 매년 수조원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다. 유상증자 등을 통해 이 자금을 확보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사업이 잘 안 됐을 때다. 매년 수조원을 투입했는데 신사업이 휘청이면 모회사의 기존 사업은 물론 회사의 존폐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배터리와 같은 차세대 먹거리 분야는 성공 가능성이 낮은 데다 대규모 설비투자가 뒤따라야 하는 만큼 물적분할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회사가 성장하면 이에 따른 기업 가치가 모회사에도 반영되므로 기업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 LG화학 주가는 지난해 9월 물적분할을 발표한 후 2거래일간 10% 넘게 빠졌지만, 전기차 배터리 시장 성장 기대감에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다만 상장 이후에도 자회사의 기업 가치가 모회사에 그대로 반영될지는 알 수 없다. 안 센터장은 “차세대 먹거리 분야는 불확실성이 크고, 자회사가 성장하더라도 먼 훗날의 얘기”라며 “당장 모회사의 가치가 쪼그라들 수 있는 만큼 기존 주주를 위한 대책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우찬 고려대 교수(경영학·경제개혁연대 소장)는 “물적분할 후 상장할 때 모회사 주주들에게 자회사 주식을 배당하거나 공모 단계에서 신주인수권을 주는 식으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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