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민의 ‘찐’ 트렌드

‘코르가즘’ 시대, 마스크로 막을 수 없는 향수가 뜬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1.09.11 00:02

업데이트 2021.09.13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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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호 22면

서정민의 ‘찐’ 트렌드  

최신 유행과 세태를 반영하는 신조어 중 ‘코르가즘(코+오르가즘)’이 있다. 냄새(향기) 때문에  쾌감이 최고조에 달해 흥분된 상태를 말한다. 이런 신조어까지 등장했다는 건 그만큼 향에 민감해졌다는 얘기다. 실제로 국내 향수 시장 매출은 최근 두드러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지난 8월 16일부터 22일까지 자체 온라인몰에서 진행한 뷰티 기획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기간에 가장 높은 매출 신장세를 보인 분야가 ‘니치 향수’ 분야다. 니치 향수란 ‘틈새’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니치(nicchia)’에서 유래된 말로 ‘소수를 위한 고가의 프리미엄 향수’를 지칭한다. ‘딥티크’가 무려 816% 증가했고, ‘바이레도’ 763%, ‘산타 마리아 노벨라’ 479% 등의 순서였다. 백화점 3사(롯데·신세계·현대)의 7~8월 향수 판매량 역시 전년 동기 대비 두 자리 성장세를 보였다. 전 국민이 마스크를 끼고 생활하는 팬데믹 시대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향기를 파는 향수 산업의 매출이 이렇게 성장하는 이유는 뭘까.

위로받고 싶을 때 빠르고 확실한 효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분석심리연구가인 이나미 교수(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는 이 현상을 4가지로 설명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첫째, 향기에 대한 관심과 관리할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됐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선진국으로 진입했다는 증거다. 둘째, 냄새는 위생과 밀접한 만큼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위생관념에 예민해졌다는 얘기다. 셋째, 후각은 생각이나 논리를 떠나 가장 원초적으로 느끼는 감각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그가 사용하던 옷이나 베개를 못 버리고 그의 체취로 아쉬움을 달래듯, 위기상황이 닥칠수록 인간의 오감 중 가장 원초적인 후각에 대한 의존도 또한 커진다. 넷째, 후각은 일에 집중하면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다른 감각들과 병행이 쉽다. 집콕 생활에 지루해진 사람들이 감각을 위한 소비를 늘리면서 가격은 부담이 적고 감정을 전달하기에 좋은 향수라는 매개체를 적극 활용하게 됐다고 분석할 수 있다.”

‘아로마 테라피’ 효과도 마스크 시대의 향수 산업이 성장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아로마 테라피란 향기 나는 식물에서 추출한 에센셜 오일을 사용해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방향(芳香) 요법이다. 우울하거나 무기력할 때 오렌지·라임·자스민 등의 향을 맡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초조하거나 불안할 때 일랑일랑·라벤더·장미 등의 향을 맡으면 긴장이 풀리면서 스트레스가 완화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눈·코·입·귀·촉-삶이 바뀌는 다섯 가지 비밀』의 저자인 박지숙 마인드힐링 전문가는 “우울하고 시름에 빠져 무기력해진 사람들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기분을 전환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방법이 아로마 테라피”라고 설명했다.

늘 마스크를 쓰고, 지인들과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코로나 블루와 코로나 레드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이 좋은 향수를 갖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올해 초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이유림(19)씨는 최근 자신을 위한 선물로 ‘에르메스’ 향수를 구입했다. “2030세대에게 인기 많은 한 유튜버가 ‘사람의 이미지를 결정할 때 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중요한 날 자신을 매력적이게 보이고 싶다면 향수를 활용하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는 게 구매이유다. 여러 브랜드 중 에르메스를 선택한 건 “좋아하는 명품 브랜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TV나 SNS 속 연예인·인플루언서들을 보면서 명품 가방이나 옷을 갖고 싶지만 학생이 사기엔 너무 비싸니까, 가성비 좋은 향수로 대리만족하고 있다. 포장도 예쁘고 제품 디자인도 세련돼서 SNS에 인증샷 올리기에도 좋다”고 덧붙였다.

향수는 대표적인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아이템이다. 패션 하우스 명품 브랜드들 대부분이 향수를 출시했고 동일한 브랜드 정책을 유지한다. 때문에 향수는 명품 브랜드를 소유할 수 있는 입문(엔트리) 아이템으로 인기가 많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립스틱이 이 자리를 차지했지만, 마스크 착용 및 비대면 시간 증가로 대부분의 여성들이 색조화장은 포기하면서 향수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한 것이다.

차별성 높은 소확행 아이템으로 부상

요즘 MZ세대에게 인기 있는 니치 향수들. [사진 각 브랜드]

요즘 MZ세대에게 인기 있는 니치 향수들. [사진 각 브랜드]

특히 요즘 MZ세대의 관심은 ‘니치 향수’에 쏠리고 있다. 대중적인 일반 향수에 비해 가격이 2~3배 비싸다. 프랑스 브랜드 ‘엑스니힐로’의 경우 라인에 따라 100ml 기준으로 무려 40~50만원대에 이른다. 하지만 니치 향수는 가공되지 않은 자연산 향료, 희소성 높은 재료, 고급스러운 조향으로 ‘남들과 다르고픈’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며 판매율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말과 글을 제외한 몸짓·소리·기호 등의 비언어적 신호에 주목한 책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에는 ‘후각 신분증’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인간은 저마다의 체취가 있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후각 신분증에 의해 타인으로부터 좋고 싫음을 평가받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이미지로 남다른 취향을 구현하고자 하는 MZ세대가 니치 향수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빌 브라이슨의 책 『바디-우리 몸 안내서』에 흥미로운 실험 결과가 실렸다. 냄새로 티셔츠를 고르는 실험인데, 대체로 사람들은 배우자가 입었던 옷을 쉽게 골라냈다고 한다. 오래전 화장품 CF에 등장했던 광고 카피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가 난다”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후각은, 향기는, 이처럼 특별한 이미지를 만들고 행복과 만족감을 준다. 좋았던 추억을 불러오는 중요한 매개체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나만의 향기’는 마스크로 막을 수 없다.

선데이즈드·오픈 스카이·차분한 독서가…향 이름도 상상력 저격
MZ세대의 취향을 저격하는 향수 트렌드를 꼽는다면 ‘젠더리스’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제품명’이다. ‘조 말론 런던’ 관계자는 “최근에는 향에 대한 성별의 경계가 없어지고 있다”며 “이전에는 성별로 선호하는 향이 비교적 뚜렷했지만 지금은 경계가 많이 사라지고 본인의 개성에 따라 선택하는 성향이 강해졌다”고 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신다솜 니치 향수 마케터는 “최근 몇 년 사이 하이패션에서 젠더리스가 유행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향 또한 인기를 얻게 됐다”며 “너무 여성적이거나 너무 남성적인 향은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확산하면서 ‘뻔하지 않은’ 취향을 선택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고 했다.

두산 백과사전에 따르면 인간의 후각은 약 4000가지 종류의 냄새를 인지하고 기억할 수 있다. 그 수많은 향을 남녀로 구분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향을 뿌려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름을 짓는 것도 주요 트렌드다. 예를 들어 ‘바이레도’의 향수들은 공통적으로 투명한 원통형 유리병에 검은 반구의 뚜껑을 달고 흰색 레이블에 검은 잉크로 향수명을 새겨 넣는데, 그 이름이 ‘선데이즈드’ ‘오픈 스카이’ ‘그린’ ‘블랑쉬’ 등이다. ‘그린’의 경우 어릴 때 가족을 떠난 아버지에게서 났던 냄새가 초록색 완두콩 냄새였던 것을 회상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인기가 좋은 ‘블랑쉬’는 ‘흰색’이라는 뜻으로 사랑하는 연인들의 순수함이라는 스토리텔링을 담았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태오씨가 브랜딩한 뷰티 브랜드 ‘이스라이브러리’의 룸 스프레이들은 ‘가배 차’ ‘차분한 독서가’ ‘페이퍼 플라워’라고 명명했다. 한국의 미학과 역사적 스토리를 맥락으로 디자인해온 양 디자이너는 “서양 문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한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절의 향기를 상상했다”고 했다. ‘가배 차’는 고종이 즐겨 마시던 커피의 향기를 표현한 것이다. ‘차분한 독서가’는 선비의 사랑방에서 나는 책과 묵의 향기를, ‘페이퍼 플라워’는 장원급제하고 금의환향할 때 쓰던 어사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양 디자이너는 “공간을 향기·음악·조명 등 보이지 않는 것으로 완성하려는 경향이 최근 인테리어 업계의 대세”라며 “취향을 보여주는 동시에 공간의 완성도를 높이는 이런 시도는 더욱 확산·발전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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