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친절한 길인데 걷게 된다…지리산둘레길 연 ‘파이브 아이즈’

중앙일보

입력 2021.09.09 05:00

다자우길 6회 - 지리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을 시작한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오른 등구재는 지리산둘레길 인월-금계 구간에 있는 고개다. 등구재에서 전북 남원시 산내면 중황리와 경남 합양군 마천면 창원리가 나뉜다. 손민호 기자

지리산둘레길을 시작한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오른 등구재는 지리산둘레길 인월-금계 구간에 있는 고개다. 등구재에서 전북 남원시 산내면 중황리와 경남 합양군 마천면 창원리가 나뉜다. 손민호 기자

이 한장의 사진. 환히 웃는 네 남자가 오른 고개는 해발 650m 등구재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지리산 북쪽 자락의 묵은 고개다. 사진 속 네 남자는 이원규 시인, 이상윤 ㈔숲길 이사장, 도법 스님, 그리고 박남준 시인(왼쪽부터). 이들 네 남자와 지금은 지리산을 떠나 있는 수경 스님의 길고 고단한 걸음에서 오늘날의 지리산둘레길이 시작되었다.

지리산에 다시 들었다. 이번에도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 실상사에 들러 지리산에 길을 내기 전 옛이야기도 들었다. “지리산둘레길은 순례길”이라던 도법 스님의 일갈이 아직도 쟁쟁히 울린다. 지리산을 걷는 건 여느 길을 걷는 것과 다른 일이다. 여행이라기보단 수행에 가까운 경험이다. 앞서 등구재에서 전라도와 경상도가 갈린다고 적었다. 바로잡는다. 이 좁은 고갯길에서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난다. 그리고 연결된다. 지리산을 그렇게 걸었는데, 이제야 깨달았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지리산둘레길 삼화실-대축 구간 구재봉 활공장에서 촬영한 경남 하동 악양들판. 섬진강 왼쪽이 전남 광양이고 오른쪽이 악양이다. 내내 비를 맞고 걸었는데, 구재봉에 오르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열렸다. 손민호 기자

지리산둘레길 삼화실-대축 구간 구재봉 활공장에서 촬영한 경남 하동 악양들판. 섬진강 왼쪽이 전남 광양이고 오른쪽이 악양이다. 내내 비를 맞고 걸었는데, 구재봉에 오르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열렸다. 손민호 기자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에서 지리산길이 시작됐어. 지리산 댐 반대를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지리산 살리기 운동으로 전환한 결과가 지리산둘레길이야. 현대인이 성찰의 삶을 회복하려면 온몸을 써서 자연을 걸어야 하는데, 지리산에도 막상 사람이 걸을 길이 없는 거야. 1500리 탁발순례를 하는데 큰 트럭 쌩쌩 달리는 도로를 걸었어. 안 되겠다 싶어 지리산에 사람이 걷는 길을 만들자고 정부에 건의했지.”

도법 스님이 말한 탁발순례 주요 참가자가 앞서 소개한 네 남자다. 이후 진행 과정은 익히 알려진 바다. 2007년 지리산둘레길을 조성·관리하는 ㈔숲길이 꾸려졌고, 초대 이사장에 도법 스님이 임명됐다(그 이사장 자리를 올봄 이상윤 상임이사가 물려받았다). 2008년 전북 남원 주천에서 경남 함양을 거쳐 산청 초입에 이르는 71km 구간을 개통했고, 2012년 20개 코스 274㎞의 지리산둘레길이 완성됐다. 현재는 지선이 추가돼 21개 코스 295㎞에 이른다.

드론으로 촬영한 실상사. 실상사에서 생명평화탁발순례 논의가 시작됐다. 실상사가 정면으로 바라보는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손민호 기자

드론으로 촬영한 실상사. 실상사에서 생명평화탁발순례 논의가 시작됐다. 실상사가 정면으로 바라보는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손민호 기자

지리산둘레길의 기원이 탁발순례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스님이 밥을 빌며 순례하는 수행이 탁발순례다. 밥을 빌려면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지리산둘레길의 가장 큰 특징이 지리산 자락 마을을 꼬박꼬박 방문하는 데 있다. 3개 광역단체, 5개 시·군, 20개 읍·면에 걸친 마을 110여 개를 지리산둘레길이 들어갔다 나온다.

지리산둘레길 위태-하동호 구간 양이터재 이정표. 양이터재에서 낙동강 수계와 섬진강 수계가 나뉜다. 양이터재에 내리는 비가 동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고 서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된다는 뜻이다. 손민호 기자

지리산둘레길 위태-하동호 구간 양이터재 이정표. 양이터재에서 낙동강 수계와 섬진강 수계가 나뉜다. 양이터재에 내리는 비가 동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고 서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된다는 뜻이다. 손민호 기자

마을을 잇는 길이어서 지리산둘레길은 코스 앞에 숫자를 붙이지 않는다. 하여 지리산둘레길엔 1코스가 없다. 길이 시작하는 1코스가 없으니 길이 끝나는 종점도 없다. 지리산둘레길에는 대신 ‘인월-금계’처럼 마을을 앞세운 코스가 있다. 탐방객으로선 영 불편하다. 이름만 봐서는 이 코스가 남원에 있는 것인지, 하동에 있는 것인지도 막막하다.

하나 지리산둘레길은 개의치 않는다. 지리산을 걷는데 시작점과 종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레 묻는다. 코스를 거꾸로 걸으면 어떻고, 설령 길을 헷갈려 옆 마을을 걸으면 무슨 상관이냐는 투다. 바깥세상에선 당연한 일이 지리산에 들면 도무지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길도 마찬가지다.

기네스 세계기록

지리산둘레길 위태-하동호 구간 대숲길. 손민호 기자

지리산둘레길 위태-하동호 구간 대숲길. 손민호 기자

지리산둘레길은 여러모로 불친절한 길이다. 우선 지리산 자락의 숱한 명소를 외면한다. 화엄사도 사하촌에서 방향을 틀고, 쌍계사 쪽으로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는다. 심지어 탁발순례를 결의했던 실상사도 코스에서 빠졌다. 최참판댁이나 스카이워크 같은 관광지는 깨끗이 무시한다. 솔직히 길도 좋지 않다. 요즘엔 지리산 자락의 마을도 어지간하면 포장도로가 많기 때문이다.

심각한 오해도 있다. 수많은 사람이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 노고단이나 천왕봉에 올라 지리산 능선을 내다볼 수 있겠다고 기대한다. 죄송한 말씀이나, 꿈 깨시라. 지리산둘레길은 단 한 발짝도 지리산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지리산둘레길은 산림청으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는다. 반면에 지리산 국립공원은 국립공원공단이 관리한다. 길의 성격이나 코스는 의외로 예산이 규정한다.

기네스 세계기록 인증서. 지리산둘레길이 세계에서 가장 긴 야생화 트레일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사단법인 숲길

기네스 세계기록 인증서. 지리산둘레길이 세계에서 가장 긴 야생화 트레일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사단법인 숲길

이런 일도 있었다. 지리산둘레길은 2019년 세계 기네스협회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긴 야생화 트레일’ 인증을 받았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심지어 공공기관도 호들갑을 떨 만한 희소식이 틀림없지만, 지리산둘레길은 변변한 보도자료도 뿌리지 않았다. 굳이 소란피울 이유를 못 느꼈단다.

지리산둘레길 삼화실-대축 구간 대봉감 밭 근처에 있는 문암송. 높이 12m의 소나무로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한다.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데도 서 있는 모습에 위엄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91호다. 손민호 기자

지리산둘레길 삼화실-대축 구간 대봉감 밭 근처에 있는 문암송. 높이 12m의 소나무로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한다.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데도 서 있는 모습에 위엄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91호다. 손민호 기자

“세계에서 순례길 이름을 단 길이 산티아고 순례길하고 구마노 고도가 있어. 하나는 기독교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 길이야. 지리산둘레길은 범종교와 시민단체가 함께해서 만든 길이야. 관(官)도 역할을 했고. 지리산둘레길은 종교와 민관을 아우르는 순례길이야. 다른 나라 순례길보다 더 뛰어난 세계적인 순례길이야.”

도법 스님 말씀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리산둘레길을 걷는다고 탁발승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길을 걷는 마음이 여느 트레일과 다른 건 누구나 인정한다. 아마도 ‘지리산둘레길을 걷는다는 것은/ 몸 안에 한 그루 푸른 나무를 숨 쉬게 하는 일(박남준 ‘지리산둘레길’ 부분)’일지 모른다. 아무리 불편하고 허술해도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사람은 끊이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리산이어서다. 지리산에는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어서다.

길 정보
지리산둘레길 지도. 그래픽 사단법인 숲길

지리산둘레길 지도. 그래픽 사단법인 숲길

지리산둘레길은 불친절하다.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코스 지도도 틀린 정보가 많으며, 제주올레처럼 이정표가 꼼꼼히 있는 것도 아니다. 길 잃을 염려는 있어도 큰 사고가 날 걱정은 없다. 마을을 잇는 길이어서 마을만 찾아가면 된다. 지리산둘레길 군데군데 배치된 7개 안내소와 센터에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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