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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면 4배’ 콜비의 유혹…1주새 배달원 3명 너무 빨리 갔다

중앙일보

입력

가을장마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린 21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도로 위로 배달라이더가 비를 맞으며 길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가을장마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린 21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도로 위로 배달라이더가 비를 맞으며 길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무수히 많은 배달 오토바이가 눈앞에 오갔지만, 8일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배달 라이더(배달원)들과 짧은 인터뷰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배달 장소에 도착한 라이더는 오토바이의 시동을 끄지 않은 채 음식을 배달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한 음식점에서 배달 음식을 받아 나오는 라이더에게 인터뷰 요청했더니 “지금 급하다. 콜을 받으면 일단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업무 일상엔 단 1분의 여유도 없어 보였다.

라이더들은 ‘콜의 홍수’에 빠져 있었다. 콜은 고객이 배달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음식을 주문하면 업장에서 라이더에게 음식 배달을 요청하는 알림을 말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배달이 급증하면서 배달 콜은 시민의 생활을 유지하는 인프라의 일부로 자리를 잡았다.

일주일 동안 세 명 사망…비 오면 콜비 4배

8일 오후 12시 50분쯤 녹번역 근처 사거리에서 난 배달 오토바이 사고. 차량 사이에 오토바이 한 대가 쓰러져있다. 4년차 라이더 문성한(34)씨는 ″오늘도 배달 오토바이 사고를 목격했다″고 말했다. 문성한씨 제공

8일 오후 12시 50분쯤 녹번역 근처 사거리에서 난 배달 오토바이 사고. 차량 사이에 오토바이 한 대가 쓰러져있다. 4년차 라이더 문성한(34)씨는 ″오늘도 배달 오토바이 사고를 목격했다″고 말했다. 문성한씨 제공

그러나, 배달 인프라가 촘촘해질수록 라이더들의 위험은 커지고 있다. 최근 일주일 동안 세 건의 사망 사고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대변해준다. 지난달 26일 서울 선릉역 사거리에서 한 라이더가 신호 대기 중이던 23톤 화물차 앞에 끼어들었다. 이를 인지하지 못한 화물차 운전자는 신호가 바뀌자 출발했고, 화물차의 시야각에 보이지 않던 오토바이 라이더가 화물차에 깔려 숨졌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2일 서울 금천구에서도 대형 차량에 배달 오토바이가 충돌해 라이더가 사망하는 사고가 두 건 있었다. 비 때문에 길이 미끄러웠던 것도 사고 위험을 키웠을 가능성도 있다.

홍대 근처 골목길에서 만난 4년 차 라이더 문성환(34)씨는 “어제도 비가 왔는데 콜비가 100미터당 1500원까지 올라갔다”며 “원래는 1㎞에 4000원(100m당 400원)이다”고 말했다. 기상 할증 등 상황이 되면 콜비가 약 4배까지 뛰어 라이더들은 무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골목에서 만난 라이더는 최근의 사고 소식에 걱정이 크다고 했다. 그는 “돈도 중요하지만,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며 “요즘 손님들은 배달이 느려도 많이 이해해주시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배달 건수가 급증하면서 실제로 오토바이 운전자 사망도 증가했다.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이륜차(오토바이) 교통사고에 따른 오토바이 탑승자 사망자 수는 2019년 498명에서 지난해 525명으로 5% 이상 늘었다.

경찰 단속 나섰지만…“보여주기식” 비판도

이륜차 사고 현황. 한국교통안전공단

이륜차 사고 현황. 한국교통안전공단

배달에 익숙한 시민들도 ‘무법 질주’ 오토바이 라이더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위험한 운행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경찰이 단속에 나섰다. 경기남부경찰청은 지난 2일 오토바이 집중 단속을 벌여 하루 만에 329건의 위법 사항을 적발했다.

라이더들은 경찰의 단속에 불만이 적지 않다고 했다. 문성환씨는 “다른 건 몰라도 차 간 주행에 대한 단속은 현실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문씨는 “최근에 보여주기식으로 이 단속을 많이 하는데 오토바이가 차량처럼 한 차선에 일렬로 쭉 서 있으면 오히려 교통이 마비된다”며 “이런 단속을 피하려다가 사고가 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똥 콜’ 못 피하게 하는 AI 배차 시스템

8일 오후 1시쯤 홍대입구역 근처 골목길에 배달 오토바이 세 대가 줄지어 세워져 있다. 라이더들은 시동을 켜놓고 음식을 배달한 뒤 바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 바빴다. 정희윤 기자

8일 오후 1시쯤 홍대입구역 근처 골목길에 배달 오토바이 세 대가 줄지어 세워져 있다. 라이더들은 시동을 켜놓고 음식을 배달한 뒤 바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 바빴다. 정희윤 기자

배달 앱의 AI 배차시스템 알고리즘도 라이더를 괴롭히는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 배달 앱 기업이 플랫폼노동자 배차 관리 방안으로 도입한 인공지능(AI) 시스템이다. 문성환씨는 “강제 배차라서 쉽게 말해서 돈도 안 되고 거리도 먼 ‘똥 콜’이 잡혀도 거절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이 알고리즘은 라이더의 ‘수락률’과 ‘배달 평점’을 매긴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AI가 배정한 콜을 거절하거나 제시간에 배달하지 못하면 라이더가 불이익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어 “동네 배달대행 업체의 경우 배달 단가가 낮아 여러 음식을 묶어서 배송하게 되고 15분 이내 픽업해 15분 이내에 배달해야 한다는 시간 압박도 있다”고 덧붙였다.

“플랫폼·소비자·정부가 머리 맞대야”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배달 라이더의 도로 교통 안전 준수의식을 고취하는 것은 물론 플랫폼 업체ㆍ소비자ㆍ정부 등이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정훈 위원장은 “이런 전반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등록제를 통해서 라이더의 안전 교육, 보험 확인 등을 의무화해야 한다”며 “관련 법도 발의됐다”고 말했다. 일명 ‘라이더보호법’(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지난달 18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을 주축으로 발의됐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빨리빨리’라는 소비자 편의성이 극대화되면서 이런 문제가 생긴 것도 있다”며 “운전자는 도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소비자는 라이더를 좀 더 이해하는 등 상호 간의 이해를 통해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소비자가 배달 앱에서 주문할 때 ‘천천히 오세요’ 문구를 선택하고 라이더는 도로 규칙을 준수해 천천히 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등의 대안도 거론되지만, 개선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값싼 배달 비용의 문제도 지적된다. 서 교수는 “이 비용으로 이렇게 빨리 배달하는 곳은 한국뿐”이라고 지적했다. 15~30분 안에 배달이 되는 비용이 대략 4000원이면 너무 저렴하다는 것이다. 그는 “소비자들의 기대 수준이 너무 높아져 조금은 조정할 필요가 있다. ‘30분 안에 오면 6000원, 1시간 이내는 8000원’ 등의 배달료 차별화도 필요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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