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를 벽면 삼아 명상, 아버지는 작업실의 수도자”

중앙일보

입력 2021.09.09 00:03

업데이트 2021.09.13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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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한 장면. 김창열 화백과 그의 프랑스인 아내 마르틴 여사 슬하의 둘째 아들 김오안 감독이 아버지의 삶과 작품세계를 절제된 영상으로 담아냈다. [사진 미루픽처스]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한 장면. 김창열 화백과 그의 프랑스인 아내 마르틴 여사 슬하의 둘째 아들 김오안 감독이 아버지의 삶과 작품세계를 절제된 영상으로 담아냈다. [사진 미루픽처스]

지난 1월 별세한 ‘물방울 화가’ 고(故) 김창열 화백(1929~2021)을 다룬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The Man Who Paints Water Drops)’가  12·16일 공개된다. 9일 메가박스 백석(경기도 일산)에서 개막하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행사에서다. 프랑스·한국 공동제작으로 지난 5월 캐나다 핫독스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지난 6월 폴란드 크라코우 영화제에선 예술성이 높은 영화에 주는 실버 혼(Silver Horn)상을 받았다.

연출은 김오안(47)과 브리지트 부이요(65) 감독. 프랑스 국립예술대학과 파리국립음악원 졸업 후 사진작가와 영화감독, 음악가로 활동 중인 김 감독은 김창열 화백과 프랑스인 부인 마르틴 사이 둘째 아들이다. 연출과 음악, 내레이션까지 맡은 이 다큐멘터리가 그의 첫 장편 영화다.

영화는 맑고 투명한 물방울 그리기에 집착한 아버지의 그림을 쏙 빼닮았다. 시적인 영상과 음악, 아버지와의 대화를 섬세하게 빚어냈다. 1929년 평안도 맹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겪고, 뉴욕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해 침묵 속에 산 화가의 뒷모습이 담겼다.

영화는 중년이 된 아들이 수수께끼 같은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떠난 여정의 기록이자 ‘물방울 그림’의 기원을 파고들어 간 영상 보고서다. 내레이션에서 “아버지를 다 알 것 같으면서도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빈틈이 있었다”고 한 김 감독은 “우물 바닥으로 내려가듯이 아버지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프랑스에 있는 김 감독을 영상으로 만났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공동감독 김오안(왼쪽)과 브리지트 부이요. [사진 미루픽처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공동감독 김오안(왼쪽)과 브리지트 부이요. [사진 미루픽처스]

영화를 구상한 동기는.
“저와 아버지는 서울과 파리에 살았다. 이 작업으로 연로해지는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레이션에서 “자라면서 가장 힘든 것은 아버지의 침묵이었다”고 했다.
“저는 아버지가 말이 없으셔서 항상 사람들로부터 오해받는다고 느꼈다. 특히 침묵은 많은 사람에게 그 속을 짐작할 수 없게 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침묵을 불편해한다. 아버지의 침묵 아래 이야기를 끌어내고 싶었다.”
촬영하며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됐나.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모든 질문을 다 할 수 있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해엔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다. 이 작업을 안 했다면 정말 후회했을 것 같다.”

영화는 가족이기에 볼 수 있는 김 화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어린 아들들에게 9년 동안 벽을 마주하고 수행해 깨달음을 얻은 달마대사 얘기를 즐겨 들려줬고, 그림을 그릴 때가 아니면 직접 줄을 쳐 칸을 만든 공책에 『도덕경(道德經)』을 필사했다. 아들의 눈에 선(禪)과 도교 사상에 심취한 아버지는 ‘작업실의 수도자’ ‘화실 안의 연금술사’였다.

달마대사 이야기가 비중 있게 언급됐다.
“잠들지 않으려 자신의 눈꺼풀을 베어버린 달마대사의 광기 어린 집요함과 완고함이 아버지와 닮았다. 아버지 그림에서 물방울을 지우고 나면 그냥 빈 캔버스가 나오는데, 저에겐 이게 달마대사가 마주 보던 거친 벽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없는 캔버스를 거친 벽면이라 생각하고 명상한 게 아니었을까.”

영화는 김 화백의 정신적 트라우마도 짚는다. 6·25, 15세의 김 화백은 북한에서 도망쳐 남에 왔고, 와선 북한 지지자로 몰려 처형의 위기에도 처했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건 눈앞에서 목격한 숱한 주검이었다.

김 화백의 프랑스인 부인 마르틴(80) 여사는 “친구들이 다 죽었는데 자신은 살아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았다”고 전한다. 김 화백에게 물방울 그리기는 무엇이었을까. 김 감독은 비극적 역사를 체험한 인간의 소리 없는 비명, 평생 불안을 지우기 위해 반복한 수행, 또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위였다고 해석한다. “아버지는 화실에서 연금술사처럼 오랜 세월 연구한 끝에 그가 본 모든 피를 마침내 순수한 물의 원천으로 만들어냈다”면서다.

“어릴 땐 그림이 물방울이 아니라 오토바이인 줄 알았다”는 그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아버지 작품에 경외심을 갖게 됐다. 아버지의 물방울은 그 안에 굉장한 깊이를 숨긴 매혹적인 작품”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천국처럼 그리워 한 고향, 북한에서 촬영하고 싶어 다양한 채널로 타진했으나 “기다리라”는 대답만 들었다고 한다.

김 감독에게 물방울의 의미를 물었다. “제가 확신하는 건 물방울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작은 물방울 안에는 영혼도, 빛도 담겼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작은 물방울 네다섯 개를 그리고선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했다. 한국 관객들이 아버지를 새로운 시선으로 발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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