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별세한 ‘물방울 화가’ 고(故) 김창열 화백(1929~2021)을 다룬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The Man Who Paints Water Drops)’가 12·16일 공개된다. 9일 메가박스 백석(경기도 일산)에서 개막하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행사에서다. 프랑스·한국 공동제작으로 지난 5월 캐나다 핫독스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지난 6월 폴란드 크라코우 영화제에선 예술성이 높은 영화에 주는 실버 혼(Silver Horn)상을 받았다.
연출은 김오안(47)과 브리지트 부이요(65) 감독. 프랑스 국립예술대학과 파리국립음악원 졸업 후 사진작가와 영화감독, 음악가로 활동 중인 김 감독은 김창열 화백과 프랑스인 부인 마르틴 사이 둘째 아들이다. 연출과 음악, 내레이션까지 맡은 이 다큐멘터리가 그의 첫 장편 영화다.
영화는 맑고 투명한 물방울 그리기에 집착한 아버지의 그림을 쏙 빼닮았다. 시적인 영상과 음악, 아버지와의 대화를 섬세하게 빚어냈다. 1929년 평안도 맹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겪고, 뉴욕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해 침묵 속에 산 화가의 뒷모습이 담겼다.
영화는 중년이 된 아들이 수수께끼 같은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떠난 여정의 기록이자 ‘물방울 그림’의 기원을 파고들어 간 영상 보고서다. 내레이션에서 “아버지를 다 알 것 같으면서도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빈틈이 있었다”고 한 김 감독은 “우물 바닥으로 내려가듯이 아버지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프랑스에 있는 김 감독을 영상으로 만났다.
- 영화를 구상한 동기는.
- “저와 아버지는 서울과 파리에 살았다. 이 작업으로 연로해지는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내레이션에서 “자라면서 가장 힘든 것은 아버지의 침묵이었다”고 했다.
- “저는 아버지가 말이 없으셔서 항상 사람들로부터 오해받는다고 느꼈다. 특히 침묵은 많은 사람에게 그 속을 짐작할 수 없게 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침묵을 불편해한다. 아버지의 침묵 아래 이야기를 끌어내고 싶었다.”
- 촬영하며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됐나.
-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모든 질문을 다 할 수 있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해엔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다. 이 작업을 안 했다면 정말 후회했을 것 같다.”
영화는 가족이기에 볼 수 있는 김 화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어린 아들들에게 9년 동안 벽을 마주하고 수행해 깨달음을 얻은 달마대사 얘기를 즐겨 들려줬고, 그림을 그릴 때가 아니면 직접 줄을 쳐 칸을 만든 공책에 『도덕경(道德經)』을 필사했다. 아들의 눈에 선(禪)과 도교 사상에 심취한 아버지는 ‘작업실의 수도자’ ‘화실 안의 연금술사’였다.
- 달마대사 이야기가 비중 있게 언급됐다.
- “잠들지 않으려 자신의 눈꺼풀을 베어버린 달마대사의 광기 어린 집요함과 완고함이 아버지와 닮았다. 아버지 그림에서 물방울을 지우고 나면 그냥 빈 캔버스가 나오는데, 저에겐 이게 달마대사가 마주 보던 거친 벽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없는 캔버스를 거친 벽면이라 생각하고 명상한 게 아니었을까.”
영화는 김 화백의 정신적 트라우마도 짚는다. 6·25, 15세의 김 화백은 북한에서 도망쳐 남에 왔고, 와선 북한 지지자로 몰려 처형의 위기에도 처했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건 눈앞에서 목격한 숱한 주검이었다.
김 화백의 프랑스인 부인 마르틴(80) 여사는 “친구들이 다 죽었는데 자신은 살아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았다”고 전한다. 김 화백에게 물방울 그리기는 무엇이었을까. 김 감독은 비극적 역사를 체험한 인간의 소리 없는 비명, 평생 불안을 지우기 위해 반복한 수행, 또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위였다고 해석한다. “아버지는 화실에서 연금술사처럼 오랜 세월 연구한 끝에 그가 본 모든 피를 마침내 순수한 물의 원천으로 만들어냈다”면서다.
“어릴 땐 그림이 물방울이 아니라 오토바이인 줄 알았다”는 그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아버지 작품에 경외심을 갖게 됐다. 아버지의 물방울은 그 안에 굉장한 깊이를 숨긴 매혹적인 작품”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천국처럼 그리워 한 고향, 북한에서 촬영하고 싶어 다양한 채널로 타진했으나 “기다리라”는 대답만 들었다고 한다.
김 감독에게 물방울의 의미를 물었다. “제가 확신하는 건 물방울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작은 물방울 안에는 영혼도, 빛도 담겼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작은 물방울 네다섯 개를 그리고선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했다. 한국 관객들이 아버지를 새로운 시선으로 발견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