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표가 많이 나왔지요.”
더불어민주당의 충청권 경선 결과 발표 뒤 이재명 경기지사가 이상민 당 선거관리위원장에게 했다는 말이다. 이 지사 본인에게도 캠프 관계자들에게도 충청권 압승은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이재명 캠프 초선 의원)였다. 이 지사는 권리당원·대의원이 참여한 대전·충남(4일), 세종·충북(5일) 투표에서 합산 득표 54.72%로 이낙연 전 대표(28.19%)에 26.53%포인트 앞섰다. 이재명 캠프 관계자는 “권리당원들의 표심이 생각보다 빨리 이 지사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했다.
민주당 권리당원 70만4917명(지난달 31일 기준) 중 다수는 친문재인 성향이란 게 정설이다. 문 대통령이 당 대표였던 2015년 ‘온라인 당원제’가 도입 이후 크게 늘었고 이들은 2017년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몰표(57%)를 줬다. 맹목적인 ‘문 대통령 지킴이’를 자처한 ‘문파’ ‘문꿀오소리’ ‘달빛기사단’ 등도 이들 사이에서 등장했다.
반면 당시 문 대통령에게 “권위적 가부장” “참 답답하신 후보”라고 쏘아붙였던 이 지사는 4년여 간 민주당의 비주류 주자였다. “이재명은 위험한 인물”이란 문파의 비판도 그때 나왔다. 지난 7월1일 출마선언 때까지도 민주당엔 그가 신주류의 대표자임을 선뜻 인정하는 인사가 많지 않았다. 온라인 권리당원들이 경선 초반부터 이 지사에게 쏠린 것을 두고 “상전벽해”(수도권 재선 의원)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文과 간극 좁힌 이재명…측면 지원한 김어준·이해찬
이 지사는 지난해 7월 대법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관련 무죄 취지 파기환송으로 기사회생한 직후부터 친문 지지층을 향해 차근차근 다가갔다. 친여 유튜브 채널 ‘김용민TV’에서 “(2017년 경선에서 문 대통령을 공격한 것은) 싸가지가 없었다”(지난해 7월 말)고 자책한 게 시작이었다. 최근엔 유튜브 채널 ‘박시영TV’에 출연해 “며칠 전 수도권 단체장 회의로 청와대에 갔는데 회의가 끝나고 문 대통령이 집무실에 가서 차 한 잔을 주면서 ‘마음고생 많았다’고 위로해줬다”(지난 7월 15일)고 말했다. 한 친문 인사는 “강성 지지층에게 ‘문심(文心)도 나에게 있다’고 어필한 것”이라고 말했다.
친노·친문 진영의 좌장격인 이해찬 전 대표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우호적 메시지가 강성지지층 기류 변화의 분기점이 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반명(反明)’ 주자들이 경선연기론을 폈던 지난 6월 말 이 전 대표는 “상황이 바뀌었다고 원칙을 바꿀 이유가 없다”며 이 지사 편에 섰다. 지난달 ‘황교익 경기관광공사 임명 논란’ 땐 황교익 씨에게 전화를 걸어 자진 사퇴의 출구를 연 것도 이 전 대표였다. 이 지사는 이 전 대표와 가까운 우원식(선대위원장)·조정식(총괄본부장) 의원 등을 캠프의 좌장으로 앉혔다.
일군의 문파들에게 좌표를 제공해 온 친여 방송인 김어준씨가 최근 이 지사를 향한 각종 의혹들을 방어하는 데 노골적으로 앞장서는 것도 적잖게 작용하고 있다. 이 지사의 변호사비 대납 의혹이 일자 김씨는 지난달 31일 자신이 진행하는 TBS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경선에 미칠 만한 이슈가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경기도의 기본소득 홍보비 논란에도 “그게 꼭 선거용인가”(지난달 9일)라고 반발했다. 친문계의 한 초선 의원은 “이 지사가 꾸준히 문 대통령을 향한 존경을 표시해 온 데다 캠프 차원에서도 친문 진영을 향한 유화책을 계속 내밀며 의구심을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사면론 이후 文에 박자 못 맞춘 이낙연
반면 친문 권리당원의 전폭적 지지로 지난해 당 대표가 됐던 이낙연 전 대표는 경선 초반 깊은 상실감을 맛봤다. 문 대통령과 미묘한 엇박자를 낸 게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1월 꺼낸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론이다. 문 대통령이 “지금은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다”(1월 18일 신년기자간담회)라고 부인하면서 지지층 사이에선 이 전 대표의 ‘정체성 논란’까지 일었다.
이 전 대표가 지난달 경선 레이스 국면에서 주장한 ‘검찰·언론개혁’도 문 대통령의 주장과는 맞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검찰·언론개혁에 말을 아끼거나 속도조절론을 시사해왔지만 이 전 대표는 “정기국회 안에 수사·기소 완전 분리를 제도적으로 마무리하겠다”(지난달 26일)는 등의 강경론으로 일관했다.
배종찬 인사이트K 연구소장은 “이 전 대표가 전반적으로 문 대통령의 코드를 잘못 읽으면서 친문 지지층으로부터 ‘마음 급한 후보’라는 이미지만 줬다”며 “문재인 정부 최장수 총리 등의 수혜자 이미지에 갇히면서 권리당원들의 지지를 잃었다”고 말했다.
“일단 이기고 보자” “지면 다 죽는다”
거세진 ‘정권교체’ 여론에 자극된 위기감도 권리당원들의 빠른 선택의 원인으로 거론된다. 지난 3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8월31~9월2일)에서 ‘정권교체론’은 49%로 ‘정권유지론’(37%)보다 12%포인트 높았다. 같은 조사에 이 지사의 지지율은 24%로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19%)보다 5%포인트 높았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참조). “최근 민주당 후보 중에선 본선에서 이길 후보가 이 지사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커졌다”(충청권 초선 의원)는 분석이 나온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김경수 전 경남지사나 유시민 이사장 등 ‘친문 적통’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이 지사는 문파의 유일한 대안일 것”이라고 말했다. 당내에선 “‘정권을 내주면 다 죽는다’는 우려에 본선경쟁력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한 당직자)이라는 말도 나온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정치학 박사)은 “문파들은 가치나 이념보다는 정치적 이익을 우선시하므로 여론조사 상 높은 지지율을 가진 후보에 쏠리는 것”이라며 “그러나 비전이나 정책을 보는 시각이 부족한 이들의 의사에 휘둘려선 본선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