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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리 표가 많이 나왔죠?" 이재명도 놀란 문파의 전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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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인 이재명 경기지사가 5일 오후 충북 청주 CJB컨벤션센터에 열린 민주당 세종·충북 합동연설회에 참석해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김성태 기자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인 이재명 경기지사가 5일 오후 충북 청주 CJB컨벤션센터에 열린 민주당 세종·충북 합동연설회에 참석해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김성태 기자

“왜 이리 표가 많이 나왔지요.”
더불어민주당의 충청권 경선 결과 발표 뒤 이재명 경기지사가 이상민 당 선거관리위원장에게 했다는 말이다. 이 지사 본인에게도 캠프 관계자들에게도 충청권 압승은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이재명 캠프 초선 의원)였다. 이 지사는 권리당원·대의원이 참여한 대전·충남(4일), 세종·충북(5일) 투표에서 합산 득표 54.72%로 이낙연 전 대표(28.19%)에 26.53%포인트 앞섰다. 이재명 캠프 관계자는 “권리당원들의 표심이 생각보다 빨리 이 지사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했다.

민주당 권리당원 70만4917명(지난달 31일 기준) 중 다수는 친문재인 성향이란 게 정설이다. 문 대통령이 당 대표였던 2015년 ‘온라인 당원제’가 도입 이후 크게 늘었고 이들은 2017년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몰표(57%)를 줬다. 맹목적인 ‘문 대통령 지킴이’를 자처한 ‘문파’ ‘문꿀오소리’ ‘달빛기사단’ 등도 이들 사이에서 등장했다.

반면 당시 문 대통령에게 “권위적 가부장” “참 답답하신 후보”라고 쏘아붙였던 이 지사는 4년여 간 민주당의 비주류 주자였다. “이재명은 위험한 인물”이란 문파의 비판도 그때 나왔다. 지난 7월1일 출마선언 때까지도 민주당엔 그가 신주류의 대표자임을 선뜻 인정하는 인사가 많지 않았다. 온라인 권리당원들이 경선 초반부터 이 지사에게 쏠린 것을 두고 “상전벽해”(수도권 재선 의원)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文과 간극 좁힌 이재명…측면 지원한 김어준·이해찬

이 지사는 지난해 7월 대법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관련 무죄 취지 파기환송으로 기사회생한 직후부터 친문 지지층을 향해 차근차근 다가갔다. 친여 유튜브 채널 ‘김용민TV’에서 “(2017년 경선에서 문 대통령을 공격한 것은) 싸가지가 없었다”(지난해 7월 말)고 자책한 게 시작이었다. 최근엔 유튜브 채널 ‘박시영TV’에 출연해 “며칠 전 수도권 단체장 회의로 청와대에 갔는데 회의가 끝나고 문 대통령이 집무실에 가서 차 한 잔을 주면서 ‘마음고생 많았다’고 위로해줬다”(지난 7월 15일)고 말했다. 한 친문 인사는 “강성 지지층에게 ‘문심(文心)도 나에게 있다’고 어필한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 6월 도라산역 열차탑승행사에서 이재명 경기지사(왼쪽)가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6월 도라산역 열차탑승행사에서 이재명 경기지사(왼쪽)가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친노·친문 진영의 좌장격인 이해찬 전 대표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우호적 메시지가 강성지지층 기류 변화의 분기점이 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반명(反明)’ 주자들이 경선연기론을 폈던 지난 6월 말 이 전 대표는 “상황이 바뀌었다고 원칙을 바꿀 이유가 없다”며 이 지사 편에 섰다. 지난달 ‘황교익 경기관광공사 임명 논란’ 땐 황교익 씨에게 전화를 걸어 자진 사퇴의 출구를 연 것도 이 전 대표였다. 이 지사는 이 전 대표와 가까운 우원식(선대위원장)·조정식(총괄본부장) 의원 등을 캠프의 좌장으로 앉혔다.

일군의 문파들에게 좌표를 제공해 온 친여 방송인 김어준씨가 최근 이 지사를 향한 각종 의혹들을 방어하는 데 노골적으로 앞장서는 것도 적잖게 작용하고 있다. 이 지사의 변호사비 대납 의혹이 일자 김씨는 지난달 31일 자신이 진행하는 TBS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경선에 미칠 만한 이슈가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경기도의 기본소득 홍보비 논란에도 “그게 꼭 선거용인가”(지난달 9일)라고 반발했다. 친문계의 한 초선 의원은 “이 지사가 꾸준히 문 대통령을 향한 존경을 표시해 온 데다 캠프 차원에서도 친문 진영을 향한 유화책을 계속 내밀며 의구심을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사면론 이후 文에 박자 못 맞춘 이낙연

반면 친문 권리당원의 전폭적 지지로 지난해 당 대표가 됐던 이낙연 전 대표는 경선 초반 깊은 상실감을 맛봤다. 문 대통령과 미묘한 엇박자를 낸 게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1월 꺼낸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론이다. 문 대통령이 “지금은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다”(1월 18일 신년기자간담회)라고 부인하면서 지지층 사이에선 이 전 대표의 ‘정체성 논란’까지 일었다.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이 전 대표가 지난달 경선 레이스 국면에서 주장한 ‘검찰·언론개혁’도 문 대통령의 주장과는 맞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검찰·언론개혁에 말을 아끼거나 속도조절론을 시사해왔지만 이 전 대표는 “정기국회 안에 수사·기소 완전 분리를 제도적으로 마무리하겠다”(지난달 26일)는 등의 강경론으로 일관했다.

배종찬 인사이트K 연구소장은 “이 전 대표가 전반적으로 문 대통령의 코드를 잘못 읽으면서 친문 지지층으로부터 ‘마음 급한 후보’라는 이미지만 줬다”며 “문재인 정부 최장수 총리 등의 수혜자 이미지에 갇히면서 권리당원들의 지지를 잃었다”고 말했다.

“일단 이기고 보자” “지면 다 죽는다”

거세진 ‘정권교체’ 여론에 자극된 위기감도 권리당원들의 빠른 선택의 원인으로 거론된다. 지난 3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8월31~9월2일)에서 ‘정권교체론’은 49%로 ‘정권유지론’(37%)보다 12%포인트 높았다. 같은 조사에 이 지사의 지지율은 24%로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19%)보다 5%포인트 높았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참조). “최근 민주당 후보 중에선 본선에서 이길 후보가 이 지사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커졌다”(충청권 초선 의원)는 분석이 나온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에선 "반드시 정권을 다시 잡아야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이 반복돼선 안된다"는 말이 나온다. 사진은 2009년 조사를 받고 대검찰청을 나서는 노 전 대통령과 뒤를 따르는 문재인 대통령. 중앙포토

차기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에선 "반드시 정권을 다시 잡아야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이 반복돼선 안된다"는 말이 나온다. 사진은 2009년 조사를 받고 대검찰청을 나서는 노 전 대통령과 뒤를 따르는 문재인 대통령. 중앙포토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김경수 전 경남지사나 유시민 이사장 등 ‘친문 적통’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이 지사는 문파의 유일한 대안일 것”이라고 말했다. 당내에선 “‘정권을 내주면 다 죽는다’는 우려에 본선경쟁력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한 당직자)이라는 말도 나온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정치학 박사)은 “문파들은 가치나 이념보다는 정치적 이익을 우선시하므로 여론조사 상 높은 지지율을 가진 후보에 쏠리는 것”이라며 “그러나 비전이나 정책을 보는 시각이 부족한 이들의 의사에 휘둘려선 본선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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