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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200만여 명 신용사면, 시장 왜곡 우려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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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청와대에서 고승범 금융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청와대에서 고승범 금융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 대통령, 그제 금융위원장에게 직접 지시

도덕적 해이 만연하고, 금융업 근간 흔들어

관치(官治)금융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연체자 신용 회복을 명분으로 200만여 명에게 ‘신용 사면’이 추진되고, 집값 안정을 겨냥해 마이너스통장 대출 한도를 조이는 식의 시장 개입이 꼬리를 물고 있다. 신용 사면이란 은행 등에서 돈을 빌려 쓴 뒤 갚지 못했다는 연체 기록을 없애주는 조치를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은 그제 고승범 금융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비공개 환담 자리에서 “코로나로 인한 연체자 200만여 명이 빠짐없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철저히 신용 사면을 준비해 달라”고 지시했다.

지난 7월 문 대통령이 ‘연체자 신용 회복 지원 방안’ 마련을 지시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금융권의 반응이다. 당시 2000만원 이하 연체자가 올 연말 전액 상환하면 연체 이력을 면제하는 지원안이 발표됐다.

신용 사면은 코로나 피해자를 돕는다는 선의의 취지와 달리 심각한 시장 왜곡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은행은 고객이 맡긴 돈을 대출해 주고 남긴 이자로 생존한다. 그만큼 연체는 금융업 최대의 리스크로 꼽힌다. 그래서 은행은 금융회사끼리 연체 기록을 공유해 신용불량자를 걸러낸다. 하지만 신용 사면 조치는 금융회사 간 연체 기록 공유와 활용을 제한한다. 돈을 빌려줄 때 신용불량자를 구별할 길이 없어진다. 기존 연체자는 신용등급이 올라가는 효과를 얻으면서 추가 대출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그만큼 부실 가능성이 커지고, 그 여파로 금융시장의 불안이 증폭될 수 있다.

금융업의 본질을 흔들고 있지만, 금융회사들은 정부가 실행에 나서면 거부할 만한 힘이 없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금융감독원 감사 등을 통해 금융회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현실 때문이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대출이 부실화해도 정부 지침에 따랐다는 변명이 가능하다.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국제금융 경쟁력이 후진국에 비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제부터 4대 시중은행 모두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기존 1억원 안팎에서 5000만원으로 줄인 것도 시장에 혼란을 주는 조치다. 지금처럼 집값이 과열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자기 돈만으로 집을 사고 전셋값을 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결국 정책 실패로 촉발된 집값 과열을 대출 규제로 잡겠다는 발상에서 마이너스통장까지 옥죄는 것인데, 실수요자의 고통만 키울 뿐이다. 돈줄을 조인다고 해서 온갖 규제로 비정상이 된 부동산 정책이 정상화될 리 없다.

지금은 가뜩이나 시중금리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시점이다. 정부가 관치에 나서지 않아도 금리가 올라가면 대출 문턱은 저절로 높아진다. 신용이 있으면 자기 책임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신용 시스템까지 무력화하고 도덕적 해이가 퍼지면 금융시장 질서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