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성벽서 신라여성 인골…‘인간 제물’ 흔적 또 나왔다

중앙일보

입력 2021.09.08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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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고대사의 어두운 비밀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경북 경주시 월성 서쪽 성벽의 문지(門址·문이 있었던 터)에서 인신공희(人身供犧)로 추정되는 인골 1구를 발굴했다고 7일 밝혔다. 인신공희는 제사에서 사람을 바치는 일이다. 이번에 발견된 인골은 성장이 끝난 키 135㎝ 여성.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던 계급의 사람일 것으로 추정한다. 목걸이와 팔찌 등 장신구를 걸쳤고 왼쪽 손 옆엔 복숭아씨가 발견됐다. 하늘을 보며 누운 ‘신전장’ 자세로 묻혔다.

경주 월성 서문 터에서 발견된 여성 인골. 장식품을 차고 있었다. 키 135㎝로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계급 사람으로 추정된다. [사진 문화재청]

경주 월성 서문 터에서 발견된 여성 인골. 장식품을 차고 있었다. 키 135㎝로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계급 사람으로 추정된다. [사진 문화재청]

인신공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순장이다. 왕 등이 사망하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에선 6세기 초까지 순장이 있었다고 한다. “지증왕 3년(502년) 봄 2월에 영을 내려 순장(殉葬)을 금하게 하였다. 이전에는 국왕(國王)이 죽으면 남녀 다섯 명씩 순장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금하게 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이번 유골은 지난 2017년 50대 남녀 유골이 발견된 자리에서 50㎝ 떨어진 곳에서 같은 방향으로 누운 채 나왔다. 당시에도 학계에선 한국 역사상 처음 성벽에서 발견된 인신공희 흔적이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유골은 성벽의 기초공사가 끝난 지점, 돌벽의 가장자리에 누워있어 성벽을 높이 올리기 전 무너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인신공희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확실한 ‘인신공희’ 증거는 인골의 오른쪽 어깨 옆에서 발견된 토기다. 액체류를 담는 토기 두 개를 겹친 것으로, 2017년 발견된 인골 발치에서도 나왔다. 겹친 토기는 인신공희에서만 볼 수 있는 형태다.

2017년 발견된 50대 남녀의 인골과 같은 방향으로 누웠는데, 성벽 시작부분의 단면 방향과도 일치한다. 성벽 안전을 기원하며 묻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사진 문화재청]

2017년 발견된 50대 남녀의 인골과 같은 방향으로 누웠는데, 성벽 시작부분의 단면 방향과도 일치한다. 성벽 안전을 기원하며 묻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사진 문화재청]

◆왜 성벽에 묻었을까=당시 축성(築城)은 국방력과도 직결됐는데, 신라는 삼국 중 축성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은 “고구려, 백제, 신라 중 신라가 가장 견고하고 높은 성을 쌓았다. 삼국통일의 근원적인 힘도 성곽에서 찾을 수 있다”며 “축성 기술이 언제부터 어떻게 형성됐는지가 학계의 오랜 관심사”라고 말했다.

이성주 경북대 교수는 “중국에서는 인신공희가 룽산(龍山)시대에 크게 유행했고 상나라 때도 성벽을 축조할 때 이런 인신공희를 치렀다”며 “특히 성벽 내부 중에서도 문지 근처에서 많이 했다. 많은 사람이 의례 수행을 보면서 내부 결속도 다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성이 튼튼하게 지어지고 자신들을 방어해주기를 기원하면서 인간을 제물로 바치고 그 자리 위에 성벽을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이번 발굴은 국내 유일한 성벽 인신공희 사례로, 자료들이 축적되면 신라인들이 성벽을 쌓고, 무너지지 않도록 염원하며 어떤 제의를 했는지 밝혀질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중국과의 시차는 당혹스러운 측면도 있다. 성벽을 올리며 인신공희를 한 중국의 룽산문화는 기원전 3000~기원전 2000년에 발달했고, 상나라(기원전 1600년~기원전 1046년) 시기도 신라 건국보다 1000년 앞선다. 이성주 교수는 “상나라 이후 등장한 주나라 때 의례 혁명이 있었고 그 이후 인신공희와 같은 방식은 원시적이라며 폐기했다. 그런데 수천 년 뒤 신라 경주 한복판에서 이런 의례가 행해졌다는 게 흥미롭다”며 “삼국의 초기국가 형성기에 이런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높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인골 어깨 옆의 두겹 토기.

인골 어깨 옆의 두겹 토기.

◆월성이 지어진 건 2세기? 4세기?=“22년(101년) 봄 2월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월성이라 지었고, 그해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이다. 하지만 다른 분석이 나온다.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이번 조사로 월성이 4세기 전기~중기 정도에 축조돼 대략 50년가량 공사 후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발굴된 토기, 나무조각 등의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다. 다만, 삼국사기에 ‘487년 월성을 새롭게 수리했다’는 기록도 있다. 학계가 남쪽 성벽 등 다른 구역을 조사하며 풀어야 할 숙제다.

인골 어깨 옆의 두겹 토기(특수촬영). 인신공희에서만 볼 수 있는 형태다. [사진 문화재청]

인골 어깨 옆의 두겹 토기(특수촬영). 인신공희에서만 볼 수 있는 형태다. [사진 문화재청]

또 인신공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도 관심사다. 이번 조사 지점으로부터 약 10m 떨어진 곳에서 1985년과 1990년에 인골 20여 구를 수습한 바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은 “30여 년 전엔 인골에 큰 관심이 없었고, 당시 출토 정황을 복원하기 힘들어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인신 제사가 월성 전체에 걸쳐서 있었는지 문지에서만 있었는지는 추가로 밝혀져야 한다”고 했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도 “성벽 축조 과정에서 한두 명 정도로 생각했는데, 훨씬 많은 인신공희가 있었던 것 같다”며 “월성 축조에 그만큼 공력을 들였고 또한 이것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길 신라 사람들이 염원했음을 보여준다. 4~5세기 신라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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