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신라 여성, 그녀는 제물이었다…머리맡 두 겹 토기의 증언

중앙일보

입력 2021.09.07 16:30

업데이트 2021.09.07 16:53

경주 월성 서쪽 문터 옆에서 발견된 여성의 인골(노란색)은 지난 2017년 발견된 남녀의 인골(초록색)과 똑같은 방향으로 누운 채 발견됐다. 이들이 누운 방향은 성벽 시작부분의 단면 방향과도 일치한다. 성벽의 안전을 기원하며 일부러 묻은 점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자료 문화재청

경주 월성 서쪽 문터 옆에서 발견된 여성의 인골(노란색)은 지난 2017년 발견된 남녀의 인골(초록색)과 똑같은 방향으로 누운 채 발견됐다. 이들이 누운 방향은 성벽 시작부분의 단면 방향과도 일치한다. 성벽의 안전을 기원하며 일부러 묻은 점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자료 문화재청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7일 온라인 기자간담회를 열어 여성 인골, 인신공희 등과 관련된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월성은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일대의 성으로, 초승달 모양으로 생겨 '월성' 또는 '신월성' '반월성' 등으로 불린다. 신라가 지은 최초의 왕성이기도 하다. 다음은 쟁점 사항에 대한 연구소 측의 답변이다.

①묻힌 여성은 누구였을까

월성 서문 터 옆에서 발견된 키 135cm 여성의 시신은 목걸이와 팔찌(왼팔)를 찬 채 발견됐다. 성인여성이지만 영양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계급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사진 문화재청

월성 서문 터 옆에서 발견된 키 135cm 여성의 시신은 목걸이와 팔찌(왼팔)를 찬 채 발견됐다. 성인여성이지만 영양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계급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사진 문화재청

이번에 발견된 인골은 뼈의 발달 상태로 미루어보아 성장이 다 끝난 성인 여성이지만, 키가 135㎝밖에 되지 않는다. 영양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계급에 있었던 사람일 것으로 추정한다. 목걸이와 왼쪽 팔찌 등 장신구를 걸쳤고, 왼쪽 손 옆에서는 특이하게 복숭아씨가 발견됐다. 정확한 연령대 추정은 아직 추가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하늘을 보며 똑바로 누워있는 ‘신전장’ 자세로 묻혔다. 외상의 흔적도 없어 편안한 상태에서 죽었거나, 죽은 이후 아직 굳기 전 시신을 곧게 펼 수 있는 상태일 때 성벽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②진짜 성벽 공사에 ‘제물’로 바친 걸까

경주 월성 서쪽 문터 옆에서 발견된 인골과 함께 묻혀있던 토기. 토기 두 점을 겹친 채 발견됐는데, 일반 무덤에서는 볼 수 인신공희에서만 볼 수 있는 형태다. 사진 문화재청

경주 월성 서쪽 문터 옆에서 발견된 인골과 함께 묻혀있던 토기. 토기 두 점을 겹친 채 발견됐는데, 일반 무덤에서는 볼 수 인신공희에서만 볼 수 있는 형태다. 사진 문화재청

앞서 1985년과 1990년에도 인골 20구가 이번 발견지점 10m 위치에서 발견된 적이 있지만, 이때는 명확히 ‘인신공희’라고 추정할만한 근거가 부족했다.

반면 이번 경주 성벽 유골은 지난 2017년 발견된 ‘인신공희’ 추정 유골 2점과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누운 채 발견됐다. 성벽의 기초공사가 끝난 뒤 높이 벽을 쌓아올리기 직전 단계에서 묻혔고, 돌벽의 가장자리에 평행하게 누워있다. 성벽을 높이 올리기 전 무너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인신공희를 했다는 추정에 힘을 싣는 정황이다.

가장 확실한 ‘인신공희’의 증거는 인골의 오른쪽 어깨 옆에서 발견된 토기다. 두 겹의 토기를 겹친 것으로, 지난 2017년 이번 발견지점 50㎝ 옆에서 발견된 인골의 발치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술이나 물 등 액체류를 담는 토기 두 개를 겹친 것으로, 일반 무덤에서는 볼 수 없고, 인신공희에서만 볼 수 있는 형태다.

③삼국사기의 경주 월성 축조 시기는 틀린 걸까

삼국사기에는 101년(2세기) 월성을 짓기 시작했다고 쓰여있지만, 이번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토기를 분석하고 나무조각 등의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월성은 4세기 중엽부터 50년이 넘는 공사기간을 거쳐 5세기 초에 완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과 다소 차이가 있다.

서문 일대에 한해서는 ‘4세기 축조’가 맞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과학적 연대분석과 출토 토기의 시대가 거의 동일하게 '4세기 중엽'을 가리키고, 삼국사기에 ‘487년 월성을 새롭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101년 월성 축조’를 연도까지 정확하게 적은 점은 여전히 의미가 크고, 문헌 기록과 이번 발굴조사 결과의 차이는 앞으로 남쪽 성벽 등 다른 구역을 조사하며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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