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짝사랑에 빠진 재수생에 용기 불어넣는 위스키

중앙일보

입력 2021.09.07 11:00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35) 

바를 찾는 사람의 복장은 나름 신경 쓴 티가 나는 경우가 많다. 깃이 있는 셔츠를 입는다든지, 샌들을 신지 않는다든지, 화려한 스타킹은 신지 않는다든지.

그런데 가끔 바 분위기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복장으로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물론, 여기서 ‘어울릴 것 같지 않은’이라는 생각은 어떤 가게만의 철학이거나 누군가에 의해 뇌리에 박힌 고정관념일 수 있다. 누가 어떤 복장으로 바에 들어오든 바텐더와 바라는 공간이 허락하면 될 일. 내 경우엔 알몸으로 오는 손님만 아니라면 괜찮다는 주의다.

여기 뒤로 질끈 맨 긴 생머리에 뿔테 안경, 헐렁한 후드티에 다리에 딱 달라붙는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입고 검정의 끝에 흰색이 나타나는 어디서나 보기 쉬운 스니커즈를 신은 여학생이 앉아있다. 의자 뒤에 가방을 걸쳐놓고 안경을 벗고는 백 바를 뚫어지라 살펴보는 그녀.

바를 찾는 사람의 복장은 나름 신경 쓴 티가 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가끔 바 분위기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복장으로 찾아오는 손님도 있다. [사진 pixabay]

바를 찾는 사람의 복장은 나름 신경 쓴 티가 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가끔 바 분위기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복장으로 찾아오는 손님도 있다. [사진 pixabay]

“와…. 사장님은 여기 있는 술이 뭔지 다 외워요?”
“물론이죠, 그게 제 일인 걸요.”
“머리 엄청 좋으신가 보다. 전 외우는 게 제일 힘든데.”
“저 같은 경우는 머리보다는 코와 혀로 외우니까요. 신경을 두 군데나 이용하니까 더 수월하겠죠?”

그녀에게 물수건을 건네주고 물을 한 잔 건넨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마실 술을 정할 수 있도록 살짝 반대편으로 떨어져 딴청을 부린다.

“음.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요. 역시 책만 봐서는 어떤 술을 마셔야 할지 알 수 없구나.”
“위스키는 역시 마셔봐야 알 수 있죠. 그래도 위스키에 대한 책을 읽고 오셨다니 대단한데요?”
“뭐 그 정도로 요. 지금 저는 책 읽는 게 직업이라.”

그녀는 재수생이었다. 재수학원 같은 반에서 만난 한 남자에게 반하고 말았지만, 재수생이라는 신분으로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진 pixabay]

그녀는 재수생이었다. 재수학원 같은 반에서 만난 한 남자에게 반하고 말았지만, 재수생이라는 신분으로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진 pixabay]

그녀는 재수생이었다. 우리 바 근처 재수학원에 다니는 그녀는 몇 번이나 바에 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재수생이라는 신분이 그녀를 막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드디어 용기를 내 온 것이다.

“이제 열흘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번에도 시험 망치면 부모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오늘은 기분전환 삼아 한 잔 드시고 마지막 시험 마무리 잘하면 되죠.”
“네. 저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맏딸이니까 뭔가 해내야겠다는 책임감도 있고. 근데 가장 힘들었던 게 뭔지 알아요?”
“글쎄요? 흠…. 대학생 친구들이 놀자는 거?”
“하하, 맞아요.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 가장 힘들었던 건 그놈이에요.”

그녀는 재수학원 같은 반에서 한 오빠를 만났다. 군대까지 다녀오고 뒤늦게 수능 공부를 시작한 그 까무잡잡한 피부에 탄탄한 근육질, 그리고 굵은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반하고 말았다.

“고백하려고 편지까지 다 써놨는데 건네주질 못했어요. 고등학생 때 저 같았으면 막무가내로 대쉬했을텐데, 지금은 아무래도 신분이 재수생이다 보니까. 공부에 전념해도 모자랄 판에 연애는 무슨 연애?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백바에서 위스키를 한 병 꺼내 그녀 앞에 내놓았다.

“토민툴 33년입니다.”
“이건 어떤 위스키예요?”
“맛있는 위스키죠. 가격도 그렇게 비싸지 않아요.”

그녀에게 위스키 한 잔을 따라 건네주며 위스키를 마시는 방법에 대해 알려줬다. 배운 대로 위스키를 마신 뒤 그녀가 맛에 대해 말했다.

“와, 되게 부드러워요. 이게 정말 43도짜리 술이에요? 그리고 이 달콤한 느낌은 꼭 과일주스 같아요. 그리고 뭔가 맥주를 마셨을 때 나는 향도 있는 것 같고.”
“상당히 맛 표현이 정확하신데요? 사람마다 느끼는 맛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 위스키는 대체로 그런 뉘앙스가 맞아요. 그리고 33년이라는 긴 숙성기간 덕에 피니쉬라고 하는 여운도 상당히 긴 편이죠.”
“아. 그래서 마시고 난 다음에 이렇게 향이 오래 가는 거구나. 그런데 33년이나 숙성을 했다니. 정말 오랜 시간이네요.”
“그렇죠.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차곡차곡 내공을 쌓아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게 위스키랍니다.”

위스키는 3년 숙성이든 33년 숙성이든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자신을 둘러싼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는다. 숙성고의 공기, 온도, 습도, 진동, 바람, 작은 먼지 하나까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주변 요소를 받아들이며 숙성된다. [사진 pixabay]

위스키는 3년 숙성이든 33년 숙성이든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자신을 둘러싼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는다. 숙성고의 공기, 온도, 습도, 진동, 바람, 작은 먼지 하나까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주변 요소를 받아들이며 숙성된다. [사진 pixabay]

“위스키도 참 노력파네요. 저도 1년이 그렇게 길진 않지만, 수능을 위해 연애도 포기하고 열심히 공부해왔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겠죠?”
“네, 그럼요. 그런데 위스키와 손님의 다른 점이 하나 있어요.”
“네? 그게 뭔데요?”
“위스키는 3년 숙성이든 33년 숙성이든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자신을 둘러싼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아요. 숙성고의 공기, 온도, 습도, 진동, 바람, 작은 먼지 하나까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주변 요소를 받아들이며 숙성돼가는 거죠. 만일 위스키에 좋아하는 이성이 생긴다면, 위스키는 결코 ‘더 맛있는 위스키를 위해 연애는 하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거란 거죠. 만나고 좋아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걸 겪으면서, 그 모든 걸 해나가면서 성장할 겁니다.”

“그래도 연애는 공부에 방해되는 건 맞잖아요.”
“글쎄요.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뭘 포기하고 저 성공을 손에 거뒀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사실, ‘포기’와 ‘성공’은 인과관계가 없어요. 오늘 밤에 잠자는 걸 포기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내일 있을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리란 법은 없습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지금 당장 그에게 고백해보는 건 어떨까요? 고백의 결과가 시험점수를 좌우하진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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