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경주 월성서 무슨 일이…성벽 아래서 발견된 신라여성 시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고대사의 어두운 비밀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경주 월성 서쪽 성벽의 문지(門址·문이 있었던 터)에서 인신공희(人身供犧)로 추정되는 여성 시신 1구를 발굴했다고 7일 밝혔다. 인신공희는 제사에서 공양의 희생물로 인간을 바치는 일이다. 이 여성은 키 135㎝에 체격이 왜소한 20대 여성으로 확인됐다.

월성 서쪽 성벽 아래서 여성 인골 발견 #2017년 50대 남녀 인골 이후 두번째 #전문가들 "성벽 올리며 제물로 희생"

인신공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순장이다. 왕이나 귀족 등 유력인사가 사망하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6세기 초까지 순장이 있었다고 한다. "지증왕 3년(502년) 봄 2월에 영을 내려 순장(殉葬)을 금하게 하였다. 이전에는 국왕(國王)이 죽으면 남녀 다섯 명씩 순장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하게 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경주 월성 서쪽 성벽에서 발견된 여성의 인골. 목에 거는 장신구인 경식과 팔찌 등을 차고 있었다. [사진 문화재청]

경주 월성 서쪽 성벽에서 발견된 여성의 인골. 목에 거는 장신구인 경식과 팔찌 등을 차고 있었다. [사진 문화재청]

그런데 이번에 시신이 발굴된 곳은 무덤이 아닌 성벽으로, 2017년에도 50대 남녀 시신이 발견된 곳이다. 당시 학계에선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성벽에서 발견된 인신공희의 흔적이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사고사의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조사에서 문화재청은 독극물이나 두부손상 등 살해한 흔적이 없다고 밝혔고, 인근에서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동물뼈와 제기 등이 발견되면서 사실상 인신공희로 밝혀졌다. 이번에 새로 발견된 여성 시신은 인신공희설에 쐐기를 박은 셈이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시신이 나온 위치나 같이 나온 유물을 종합적으로 보면 성벽 축조와 관련해서 제물로 제사를 지내고 묻은 게 틀림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성벽 아래에서 제사물로 쓰인 것일까.

여성 인골 주변에서 발굴된 토기들 [사진 문화재청]

여성 인골 주변에서 발굴된 토기들 [사진 문화재청]

여성 인골 주변에서 발굴된 토기의 특수촬영 [사진 문화재청]

여성 인골 주변에서 발굴된 토기의 특수촬영 [사진 문화재청]

왜 성벽에 묻었을까

경주 월성 서쪽 성벽 구역 [사진 문화재청]

경주 월성 서쪽 성벽 구역 [사진 문화재청]

지금처럼 무기가 발달하지 않은 과거엔 튼튼한 성벽을 공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따라서 축성(築城)은 국방력과도 직결됐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도 축성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은 "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서 신라가 가장 견고하고 높은 성을 쌓았다. 삼국통일의 근원적인 힘도 성곽에서 찾을 수 있다"며 "이 신라의 축성 기술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어떻게 형성됐는지가 학계의 오랜 관심거리"라고 말했다.

학계에선 성벽 아래 시신을 묻어 제사를 지낸 것도 바로 이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본다.
이성주 경북대 교수는 "인신공희는 이 성벽의 축조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룽산(龍山)시대에 크게 유행했고 상나라 때도 성벽을 축조할 때 이런 인신공희를 치렀다"며 "특히 성벽 내부 중에서도 문지 근처에서 많이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의례 수행을 보면서 내부 결속도 다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성이 튼튼하게 지어지고 자신들을 방어해주기를 기원하면서 인간을 제물로 바치고 그 자리 위에 성벽을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경주 월성 서쪽 성벽 구역 [사진 문화재청]

경주 월성 서쪽 성벽 구역 [사진 문화재청]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성벽의 인신공희는 여전히 국내 유일의 사례이며, 이러한 자료들이 계속 축적됨으로써, 신라인들이 성벽을 견고하게 쌓고, 그리고 그것이 무너지지 않게 염원하기 위해 어떤 제의를 했는지 점차 밝혀질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중국과의 시차는 당혹스러운 측면도 있다. 성벽을 올리며 인신공희를 행했던 중국의 룽산문화는 기원전 3000~ 기원전 2000년에 발달했고, 상나라(기원전 1600년~기원전 1046년)도 신라 건국보다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주 교수는 "상나라 이후 등장한 주나라 때 의례 혁명이 있었고 그 이후로 인신공희와 같은 방식은 원시적이라며 폐기했다. 그런데 수천 년을 지나 신라 경주 한복판에서 이런 의례가 행해졌다는 게 흥미롭다"며 "삼국의 초기국가 형성기에 이런 방식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높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월성이 지어진 건 2세기? 4세기?

경주 월성 서쪽 성벽 구역 [사진 문화재청]

경주 월성 서쪽 성벽 구역 [사진 문화재청]

"22년(101년) 봄 2월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월성이라 지었고, 그해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지증왕 3년 2월)

경주에 월성이 세워진 것은 101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그 시기가 지나치게 이르다며 의문을 제기했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근래에는 4세기 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월성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 것이 성벽이다. 월성의 서쪽과 남쪽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이면서 4세기 중반쯤 성이 축조됐을 가능성이 커졌다. 성벽 아래 묻힌 시신들도 4세기 무렵에 묻힌 것으로 확인됐다.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이번 조사로 월성이 4세기 전기~중기 정도에 축조돼서 대략 50년가량 공사 기간 후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럴 경우 『삼국사기』의 축성 연도는 사실상 뒤집히는 셈이다.

경주 월성 서쪽 성벽 구역 [사진 문화재청]

경주 월성 서쪽 성벽 구역 [사진 문화재청]

시신은 추가로 나올까
2017년에 이어 제물로 희생된 시신이 발견되자 학계에서는 과연 월성 일대 인신공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지에 관해서도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또 이번 조사 지점으로부터 약 10m 떨어진 곳에서 1985년과 1990년에 수습한 인골 20여 구에 대한 인신공희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은 “30여 년 전에는 인골에 큰 관심이 없었고, 당시 출토 정황을 정확히 복원하기가 힘들어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이런 인신 제사가 월성 전체에 걸쳐서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문지에서만 있었던 것인지는 추가로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도 "인신공희라는 것이 성벽 축조 과정에서 아마도 한두 명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많은 인신공희가 이루어진 것 같다"며 "월성의 축조에 그만큼 많은 공력을 들였고 또한 이것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를 신라 사람들이 굉장히 염원했다는 양상을 보여준다. 4~5세기 신라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