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영준의 시시각각

문재인 대통령 공약도 뒤집으려는 건가

중앙일보

입력 2021.09.07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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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박주민 법사위 위원장 직무대리가 25일 서울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언론중재법 개정안)을 통과 시키고 있다. 김경록 기자

박주민 법사위 위원장 직무대리가 25일 서울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언론중재법 개정안)을 통과 시키고 있다. 김경록 기자

정치인의 언어중추에는 인공지능(AI)으론 절대 못 따라갈 고성능 번역기가 내장돼 있다. 머릿속에선 정치적 이해타산의 알고리즘이 쉼없이 돌아가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늘 고결한 대의명분으로 포장된다. 이해타산과 대의명분을 이어주는 번역기의 특징은 고도의 의역(意譯)이 위주란 점이다. 간혹 어설픈 직역(直譯)으로 최대한 숨겨야 할 본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민주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4년 전 대선 공약과 정반대 내용
국제사회는 민주주의 후퇴로 평가

송영길 민주당 대표의 발언이 딱 그런 경우다. 그는 언론중재법 개정의 이유를 한참 설명하다 이에 반대하는 야당을 향해 “평생 야당만 할 생각이냐”고 했다. 아뿔싸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아닐까. 그의 발언은 언론중재법이 야당에는 불리하고 여당에는 유리한 법이라고 시인하는 자백과 마찬가지다. 설령 그게 누구나 다 꿰뚫어 보는 사실이라 해도 입 밖으로는 내지 말았어야 했다. 인권 보호와 피해 구제라는 대의명분과 달리 실제로는 이 법을 만들려는 발상부터가 정파적이고 정략적이란 얘기로 들리니 말이다.

언론중재법 개정을 정략적 발상이라 보는 이유는 또 있다. 언론 환경의 본질이 그 사이 바뀐 것도 없는데 4년 전 대선 때 공약했던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집『나라를 나라답게』의 60∼61쪽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편에는 표현의 자유,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의 자유 보장에 관한 공약들이 나온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모든 언론의 콘텐트가 인터넷으로 수렴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상 언론 자유에 관한 공약이다. 여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사실 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위법성 조각사유 대폭 확대 ^정치적 표현에 대해서는 자율규제로 전환. 나아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라고 명기하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터넷 실명제 폐지까지 공약했다. 방임에 가깝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한 셈이다. 하지만 지금 민주당이 발의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정반대다. 왜 정반대인지 설명하는 건 지면 낭비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공약집에는 “정보 게재자의 표현의 자유와 방어권 보장을 위해 정보통신망법상 사업자의 일방적 ‘임시조치’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약속도 나온다. 사이트 운영자 등이 함부로 게시물을 삭제하거나 차단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얘기다. 그런데 민주당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에서 ‘열람 차단 청구권’을 들고나왔다. 이런 규제 장치들이 이중 삼중으로 작동하면 ‘재갈’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권위있는 유엔 인권기구와 해외의 언론단체들이 줄줄이 우려를 표시하고 나선 이유가 그 때문이다. 유독 집권 여당만 그 이유를 모르는 듯한데, 하버드대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2018년 펴낸『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읽어봤으면 한다. 저자들은 선출된 정치 지도자의 잠재적 독재 성향을 감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15개의 구체적인 질문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양성반응을 보이면 독재로 흐를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20세기 이후 미국 대통령들 중에 양성 판정자는 리처드 닉슨이 유일했었는데, 도널드 트럼프가 그 대열에 합류해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게 저자들의 평가였다.

레비츠키의 지표를 지금의 한국 상황에 대입하면 어떤 평가가 나올까. 15개 질문 가운데 언론 관련 질문은 두 개다. 그중 민주당의 언론중재법은 “명예훼손과 비방, 집회금지 등 시민의 자유권을 억압하는 법률이나 정책을 지지한 적이 있는가”란 항목에서 양성 판정을 받을 게 명백하다. “상대 정당, 시민단체, 언론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는가”란 질문에서도 양성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 판정표는 고스란히 문재인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지금 한국의 언론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엄중한 시선을 “뭣도 모르면서”라고 치부하며 넘어갈 일이 아니란 얘기다.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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