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적의 적은 정말 친구일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필규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만약 히틀러가 지옥에 쳐들어간다면 나는 의회에서 악마를 지지할 것이다.” 파죽지세로 유럽 전장을 휩쓸던 나치 독일이 소련까지 침공했을 때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한 이야기다. 처칠은 뼛속까지 반공주의자였다. 그런데도 ‘적의 적은 친구’라는 국제정치의 오랜 원칙에 따라, 나치를 막기 위해 소련 같은 ‘악마’와도 동맹을 맺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지난 1일 미국 펜타곤 기자회견장에서 비슷한 상황이 재연됐다. 마크 밀리 미국 합참의장이 “이슬람국가 호라산(IS-K)의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탈레반과 협력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가능하다”고 답을 했다. 미국이 당면한 적인 IS-K를 처리하기 위해선 이들과 앙숙인 탈레반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전쟁 중엔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5일(현지시간) 한 탈레반 병사가 노획한 헬기와 전투기 등이 있는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 [AP=연합뉴스]

5일(현지시간) 한 탈레반 병사가 노획한 헬기와 전투기 등이 있는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 [AP=연합뉴스]

하지만 20년간 총구를 맞대온 적이었다. 여성을 돌로 때려죽이고 인질을 참수하던 탈레반과 갑자기 친구가 되는 것은 영 어색한 일이다. 게다가 새 지도부가 될 게 유력해 보이는 칼릴 하카니는 2011년 미국이 국제 테러리스트로 지정한 인물이다. 그의 목에 현상금 500만 달러(약 58억 원)까지 걸었다. 미 중앙정보부(CIA)에 따르면 과거 미국인의 납치·살해에도 직접 관여했고 알카에다와도 여전히 긴밀한 관계다.

물론 과거에도 순전히 ‘적의 적’이라는 이유로 미국의 친구가 된 경우는 적지 않았다. 냉전 시기, 이집트의 나세르, 칠레의 피노체트 등은 독재로 악명 높았지만, 반공주의자였기에 미국의 아낌 없는 원조를 받았다. 소련에 맞서던 아프간의 무자헤딘, 이란과 갈등 관계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부는 미국의 무기와 정보를 지원받았다. 이런 간섭을 통해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대개는 끝이 별로 좋지 않았다. 강압 통치는 자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겼고, 미군이 지원한 무기는 주변국에 위협이 됐다. 그리고 그 무기가 다시 미국을 향하기도 했다.

지금 소셜미디어엔 탈레반이 블랙호크 헬기나 험비 군용차 등 미군 장비를 대거 접수해 자랑하는 영상이 올라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탈레반에게 이를 운용할 능력이 없고, 다른 통제 카드도 많기 때문에 미국과 세계에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과거 사례를 보면 과연 그럴까 싶다.

적의 적은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또 한 번 답을 찾기 위해 세계는 앞으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아프간을 지켜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