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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셋 북송한 아버지, 웃으며 같이 밥 먹기까지 15년 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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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달 30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재일조선인 양영희 감독. 9일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될 다큐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어머니가 평생 홀로 가슴에 묻어온 제주 4·3의 뼈아픈 회고를 치매로 달라진 모녀의 일상에 담담히 녹여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달 30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재일조선인 양영희 감독. 9일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될 다큐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어머니가 평생 홀로 가슴에 묻어온 제주 4·3의 뼈아픈 회고를 치매로 달라진 모녀의 일상에 담담히 녹여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마늘 몇 개 넣어요?” “정해진 건 아니고 그릇 하나 꽉 차게 담아서….” 재일조선인 장모가 일본인 사위에게 백숙 손맛을 전수한다. 사위가 국물 한 모금에 서툰 한국말로 감탄한다. “맛있어요!”

9일 경기도 파주에서 개막하는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된 재일조선인 양영희(57) 감독의 다큐 ‘수프와 이데올로기’ 속 장면이다. ‘디어 평양’(2005), ‘굿바이, 평양’(2009) 등 남북문제를 그려온 다큐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세 편 모두 사남매 중 세 오빠를 평양에 떠나보낸 양 감독의 가족사를 다뤘다. 이번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양 감독은 2009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일본에 단둘이 남은 어머니가 80 들어서야 처음 고백한 고향 제주 4·3의 아픈 기억을 새겼다.

지난달 30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양 감독은 “개막작 선정은 처음”이라며 “이제껏 참가한 어느 영화제보다 평양에 가까운 영화제에, 만나지 못한 가족을 그린 작품을 갖고 간다는 게 기쁘면서도 복잡하다. 차 타면 바로 평양인데 오빠들, 조카들도 보러 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고 했다.

제목의 수프는 “밥”을 뜻한다. “생각·사상이 달라도 같이 밥을 먹자는 것이죠. 지금도 세상에선 종교가 다르다고 싸우고 죽이고 하잖아요. 우리 가족만 해도 이데올로기가 다른 나와 아버지가 웃으며 밥 먹을 때까지 15년쯤 걸렸으니까요.”

양 감독은 북한에 충성하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 부모를 이해할 수 없어 반항하며 자유주의자로 자랐다. 세 오빠는 그가 여섯 살 되던 해 북송사업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국’에 보내졌다. “김일성 탄생을 기념하는 선물처럼 갔죠. 그런 권력이나 조직 때문에 개인의 인생이 가볍게 다뤄지는 데에 저는 거부감이 아주 셌어요.”

2018년 70년만에 제주에 가 4·3희생자위령재례에 참석한 강정희씨(가운데)와 딸 양영희 감독(왼쪽), 당시 교제 중이던 사위 일본 언론인 아라이 카오루씨. [사진 DMZ국제다큐영화제]

2018년 70년만에 제주에 가 4·3희생자위령재례에 참석한 강정희씨(가운데)와 딸 양영희 감독(왼쪽), 당시 교제 중이던 사위 일본 언론인 아라이 카오루씨. [사진 DMZ국제다큐영화제]

영화 속 백숙 국물은 양 감독이 오사카를 떠나 도쿄에 혼자 살 때 어머니가 매달 보내주던 것. “한국은 ‘수프(국물)’의 나라잖아요. 엄마는 국물을 먹어야 한다고 제주도식으로 생선 들어간 국물도 자주 해주셨죠.”

양 감독의 어머니 강정희씨는 1930년 오사카에서 제주 출신 재일조선인 부모 사이에 태어났다. 열다섯 때 미군 공습을 피해 강씨는 부모의 고향인 제주로 피란 갔다. 3년 뒤 4·3이 닥쳤다. 강씨는 외사촌들이 죽고 외삼촌이 경찰에게 맞아 죽는 광경을 봤다. 약혼자도 그때 잃었다. 강씨는 어린 두 동생을 데리고 30㎞를 걸어 오사카 밀항선을 탔다.

“오랫동안 제 카메라를 받아들여 온 어머니인데도 4·3 이야기할 때는 ‘무섭다. 치워라’ 하셨어요. 제가 ‘한국이 달라졌다. 4·3에 대해 조사도 많이 하고 체험담도 나오고 얘기해도 된다’고 하니 구체적으로 말해주셨죠. 2012년 무렵이에요.”

양 감독은 “4·3 체험을 접하며 제주 출신인 부모님이 왜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했는지, K팝 가수도 싫어하면서 ‘남한 사람들은 잔인해, 나빠’ 하셨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고 했다.

“예전엔 사람들 앞에서 북한의 아들, 손주 자랑을 많이 하는 엄마가 솔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조국·수령님 덕택으로 잘 산다고 하는데 나는 속으로 ‘거짓말. 어머니가 소포 보내고 돈 보내고 해서 오빠들이 잘살지. 조국·수령님이 해주는 게 아닌데 왜 그렇게 북한에 대한 프로파간다 같은 말을 할까’ 했죠.”

어머니의 고백 후 그는 처음으로 오사카에 난민이 되어 돌아온 어머니의 입장을 그려봤다.

“복잡했을 거예요. 돌아온 오사카는 차별이 아주 심했죠. 희망을 걸 수 있는 종교처럼 북한을 찾은 거죠. 남 앞에선 북한의 좋은 말만 했지만, 집에서는 우셨어요. 큰오빠의 조울증에 울고(북송 후 좋아하던 음악공부를 빼앗긴 양 감독의 큰오빠는 조울증을 앓다 2009년 평양에서 사망했다.), 가족들 생각에 울고. 그런 엄마가 저는 불편했는데 일본인 남편은 오히려 ‘어머니 인생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인생이 있는 것’이라고 존중했죠. 내가 깨닫기 시작했을 때 어머니 치매가 심해지셨어요.”

재일조선인과 북한 문제를 이념을 넘어 가족의 현실로 그린 ‘디어 평양’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고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주목받으면서 양 감독은 방북이 금지됐다. “‘디어 평양’ 이후 조총련에선 사죄문 쓰고 이제 영화 안 하겠다고 하면 오빠들을 만나도록 해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 내가 어느 정도 각오로 작품을 내고 있는지 모르시는구나, 싶었죠.” 그는 사죄문 대신 평양에 있는 조카 선화를 조명한 ‘굿바이, 평양’을 만들었다. “나라 사이에는 복잡한 문제들이 많지만 저는 정치가가 아니니까. 그런 정치에 의해 불편하게 된 가족이나 한 개인의 인생을 통해 역사·정치·사회가 보이는 그런 작품을 만들겠다”고 지금껏 다짐해왔다.

“다큐를 만드는 동안 북한의 가족들이 ‘왜 이런 짓을 하냐. 우리가 벌 받으면 어떡하냐’고 칼 들고 나를 쫓아오는 꿈을 계속 꿨다”는 그다. “북의 가족 안전도 걱정되지만, 북한을 찬미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다. 가족을 지킬 수 있도록 평균대 위를 걸어가듯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다큐를 만들어왔다”면서 “나중에 북한의 가족이 봤을 때 ‘너 이런 작품 때문에 우리를 이용했냐’란 말은 안 들어야겠다는 책임감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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