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이후 세계가 한순간에 달라지는 걸 보면서 무서웠어요. 초강대국 대통령은 의학 전문가들의 권고를 가짜뉴스 취급하고, 지지자들은 광적으로 열광하며 의회를 습격하고…”
전직 부장판사에서 전업작가로 변신 #드라마 '악마판사'시청률 8%로 종영 #판결 실시간 투표 디스토피아 배경 #
지난달 22일 시청률 8%로 종영한 tvN '악마판사'의 작가 문유석(52) 전 부장판사의 말이다. 종영 후 서면 인터뷰에서 그는 이번 드라마에 대해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미래는 어떤 세상이 되고 마는 걸까? 하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해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상의 디스토피아 배경 "'미스 함무라비'와 톤만 다를 뿐, 비슷한 이야기"
'악마판사'는 그가 지난 2월 법복을 벗은 뒤 공개한 첫 작품이다. 판사 재직 시절인 2018년 JTBC '미스 함무라비'를 통해 판사 개인의 인간미가 묻어나는 현실의 법정 드라마를 선보였던 것과 달리 이번 드라마는 가상의 디스토피아라는 판타지적 배경에서 극단적 판결과 폭력이 난무하는 '매운맛' 법정을 그려냈다. 그는 "'미스 함무라비'가 방영될 때부터 '완전히 반대되는 톤의 이야기를 써보자'는 생각은 있었다"며 "'미스 함무라비'의 박차오름(고아라)이 겪었던 세상도 그다지 장밋빛은 아니었기 때문에, 두 드라마가 톤만 다를 뿐 비슷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판결 투표’… “국민 여러분, 형을 집행해주십시오”
'악마판사'의 디스토피아는 '2년 만에 역병이 끝난 대한민국'이 배경이다. “강력한 사법개혁"을 주창하며 만들어진 '시범재판'의 재판장 강요한(지성)이 주인공이다. ‘라이브 법정 쇼’를 표방하는 시범재판부는 재판의 전 과정을 생방송하고, 전 국민을 배심원 삼아 ‘디케(DIKE, 그리스 신화 ’정의의 여신‘ 이름)’ 앱으로 판결에 대한 실시간 찬반투표를 진행한다. "더 이상 상식을 외면하는, 그들만의 재판이 벌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던 강요한은 폐수 유출 사건의 기업 대표, 상습 폭행을 권력으로 무마해온 장관 아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을 선동한 유튜버 등에게 '금고 235년' '태형 30대' '전기의자' 등 극단적 판결을 잇달아 내린다.
"다크 히어로 열광했지만 결국 '폭탄테러'"
악을 악으로, 힘을 힘으로 처단하는 '다크 히어로' 강요한은 나아가 대통령을 필두로 대기업 회장, 언론사 총수 등 권력이 모인 단체 '사회적 책임 재단'의 비리를 파헤치고 마지막 재판에서는 이들을 재판정에 모아놓고 직접 폭탄을 터뜨린다. 문 작가는 “다크 히어로에 대한 열광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 대한 시민들의 분노”라면서도 “강요한의 마지막 재판은 재판일까? 사실 폭탄테러를 생중계한 것에 불과하고, 적법 절차에 따른 재판 없이 폭탄 테러에 국민들이 동의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권력의 종교화도 디스토피아”
극 중에서 재판장 강요한을 필두로 판사 김가온(진영)·오진주(김재경) 등 시범재판부 3인은 흰색·검은색의 긴 가운을 입고 삼위일체를 이루며 걷는 제사장처럼 그려진다. 재판정은 그리스 원형극장을 연상시킨다. 요한, 디케 등의 이름에도 종교적인 색채가 묻어있다. 문 작가는 “권력이 종교화하고 종교가 권력화하는 것도 디스토피아”라며 “시범재판정은 영웅화된 강요한이 대중의 맹신을 이용하고자 판을 설계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고, 이름으로 종교적 색채를 더해 고전 비극 같은 뉘앙스를 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강요한 식 극약처방...무섭고 슬픈 세상"
문 작가는 “시민들의 분노가 폭주하고, 미디어와 정치권력이 이걸 증폭시키며 악용하면 폭력과 극단주의, 혐오가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며 “‘악마판사’의 세계는 강요한 식의 극약처방 외에 대안도 없는, 무섭고 슬픈 세상“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시민들은 정치‧사법‧언론 등 ‘시스템’이 다크 히어로가 되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 할 일을 잘해서 다크 히어로가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기를 바랄 뿐”이라며 “자기가 강요한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허중세“라고 일갈했다. 극 중 대통령 허중세는 부패한 권력의 정점이다. "내가 다 바꿔줄게, 대한민국 토탈 체인지~!"를 외치며 당선됐지만 외국인과 약자에 대한 혐오를 입에 달고 산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면서 장기집권을 꿈꾼다.
문 작가는 “인간은 유도되기 쉽고, 그래서 법치주의가 필요한 것”이라며 “극 막바지에 시범재판부 판사 김가온이 하는 말, ‘요한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전했다.
"가장 공들인 씬, '삶을 놓지 않게 만들어 준 유일한 존재' 그리려"
그 와중에 문 작가가 찾은 구원은 ‘사랑’이다. 그는 가장 공들여 쓴 장면으로 윤수현(박규영) 경위가 총을 맞고 죽어가면서도 김가온의 얼굴 상처를 걱정하는 씬을 꼽았다. 고아로 자란 김가온이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낼 때 곁을 지켜준 친구가 바로 윤수현이다. 그런 김가온이 법조인이 되도록 이끈 건 소년 재판에서 만난 판사 민정호(안내상)였다. '악마판사'는 시범재판부의 오진주 판사가 소년사건 전담부를 자원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문 작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삶을 놓지 않게 만들어 준 유일한 존재를 어떻게 표현할까 많이 고민한 씬”이라며 “인구의 일정 비율은 선천적으로 소시오패스로 태어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랑으로 붙잡아줄 사람이 있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