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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숨진 장남 말하면 안됐다…'공감' 못얻은 바이든 패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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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1월 19일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에 앞서 델라웨어주 주 방위군 본부를 방문해 장남 보를 그리며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월 19일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에 앞서 델라웨어주 주 방위군 본부를 방문해 장남 보를 그리며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당신이 지옥에서 불에 타길 바래! 내 형제였어!"

아프가니스탄 카불 국제공항에서 일어난 자폭 테러로 숨진 미군 장병 13명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온 지난달 29일. 델라웨어주 도버 공군기지에서 열린 송환식에서 한 장병 유족이 활주로 멀리 있는 조 바이든 대통령을 향해 이렇게 고함쳤다.

바이든 대통령이 부인 질 여사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마크 밀리 합참의장 등 군 수뇌부와 함께 군 수송기로 도착한 유해 13구가 차량에 실리는 장면을 40여분간 서서 지켜본 뒤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행사 시작에 앞서 각 유족과 개별 면담했는데, 이때도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전했다. 한 유족은 바이든 발언은 대본을 읽는 듯했고 피상적이었다고 지적했다.

다른 유족은 바이든이 죽은 장남 보 얘기를 너무 오래 하는 게 불편했다고 말했다.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는 모습에 불만을 토로한 유족도 있었다.

자신이 겪은 슬픔을 바탕으로 비탄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인 바이든 대통령이다. 공감 능력은 그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런 그가 아프가니스탄 대피 막바지에 자폭 테러로 숨진 전사자 유족에게선 왜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을까.

WP와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 대통령이 전쟁 중에 자폭 테러로 사망한 미군 장병을 위로하면서 6년 전 뇌종양으로 숨진 장남 보 이야기를 꺼낸 것을 패착으로 꼽았다. 바이든 대통령이 정작 이번에 숨진 장병들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먼저 간 장남 보 이야기에 치중했다는 게 유족들 전언이다.

숨진 해병대원 재러드 슈미츠의 아버지 마크는 바이든 대통령이 죽은 아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고, 전사한 군인들 사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나는 그와 그의 아들에게 일어난 일보다 내 아들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면서 "대통령을 모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자식을 잊지 못해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또 보 바이든이 전쟁 중 목숨을 잃은 게 아닌데 바이든 대통령은 마치 아들이 이라크전에서 전사한 듯 이야기하는 것도 불편하다는 반응도 나왔다.

보 바이든은 델라웨어주 방위군 소속으로 이라크전에 참전했다 귀국한 뒤 2015년 뇌종양으로 숨졌다. 전사가 아니라 질병으로 숨졌는데도 바이든이 '끝없는 전쟁'을 끝내야 한다며 아프간 철군을 주장할 때 종종 사례로 언급했으며, 이날 유족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했다.

2009년 조 바이든 당시 부통령(오른쪽)과 이라크에서 복무 중이던 장남 보. [AFP=연합뉴스]

2009년 조 바이든 당시 부통령(오른쪽)과 이라크에서 복무 중이던 장남 보. [AFP=연합뉴스]

NYT는 바이든 대통령이 6년이 지나도 장남에 대한 기억을 떠나보내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각종 연설과 백악관 회의, 심지어 외국 정상과 회담에서 어떤 주제가 나와도 장남과 연결지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가끔 사담을 나눌 때 보 이야기를 하며 현재 시제로 말하기도 하고, 보의 묵주를 들고 다니는데, 멕시코 대통령과 화상 정상회담 때 꺼내 보이기도 했다.

바이든이 행정부를 구성할 때 죽은 장남의 '입김'이 작용하기도 했다. 러닝메이트로 선택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보 바이든이 델라웨어주 법무장관일 때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으로 일한 인연이 있다.

바이든은 해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발표하면서 "보가 얼마나 카멀라와 그가 하는 일을 존경했는지 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 결정을 내릴 때 그 점이 내게는 매우 중요했다"고 말했다. "보의 의견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의견은 없다"고 덧붙였다.

오스틴 국방장관은 보가 이라크에서 복무할 때 인연을 맺었다. 가톨릭 신자인 오스틴 장관은 보 옆에 앉아 미사를 드렸다고 NYT는 전했다. 바이든은 피트 부티지지 교통장관에 대해서는 "보와 많이 닮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이든은 지난 1월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이 있는 델라웨어주를 떠나기 전 델라웨어 주 방위군 본부에서 연설했다. 보 이름을 딴 건물이었다.

이 자리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채 "나는 한 가지 후회가 있다. 그 아이를 대통령으로 소개해야 하는데, 여기에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NYT는 전했다.

바이든이 지금까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원인 제공과 관련 없는 경우였기에 가능하다는 분석도 있다. 예컨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책에 손을 놓은 사이 대규모 희생자가 나왔을 때 바이든은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아픔을 공유했다.

하지만 아프간 철군 중 테러로 숨진 장병들은 바이든이 내린 철군 결정과 작전 실행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경우여서 직간접적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백악관은 바이든과 유가족 만남은 사적인 대화여서 추가로 확인할 사항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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