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 차이나 신경진의 차이나는 차이나

아프간의 심장 와칸 계곡, 중국의 화약고 찌르는 단검 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새도 날아가다 깎아지른 산에 놀라고/사람은 좁은 다리 지나기 어렵구나./평생 살아가며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오늘따라 천 줄기나 뿌리는구나.(鳥飛驚峭嶷/人去難偏樑/平生不捫淚/今日灑千行).”

신라 승려 혜초(慧超)가 실크로드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에 남긴 시다.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의 국경 92.45㎞와 맞닿은 와칸 계곡을 건너며 노래했다. 혜초가 지날 당시 와칸은 불교 문화가 꽃피는 호밀(胡蜜)로 불렸다. “차가운 눈 더미는 얼음에 얼어붙었고, 차가운 바람은 땅을 쪼갤 듯 사납다…파미르 고원을 어찌 넘을 것인가”라며 두 번째 시도 남겼다.

혜초의 실크로드 여행은 723년 중국 명주(明州, 지금의 닝보)에서 출발해 727년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에서 끝났다. ‘세상의 지붕’으로 불리는 파미르 고원 아래 호밀국을 지나며 “산골짜기에 살아 집이 협소하고 가난한 백성이 많다”며 “승려도 있고 절도 있어 소승(불교)이 행해진다”고 적었다.

혜초·고선지·마르코 폴로가 통과
당 제국, 아랍 연합군에 패해 몰락
‘제국의 무덤’ 원조는 탈라스 전쟁
중 “아프간은 영웅, 굴복한 적 없어”
신장 독립 지원 ‘ETIM’ 존재는 부담

신장 우루무치와 파키스탄 국경 쿤자랍 고개를 잇는 1948㎞ 길이의 카라코람 하이웨이(국도 314번)에서 바라본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의 국경 와칸 계곡의 끝자락. [사진 위키피디아]

신장 우루무치와 파키스탄 국경 쿤자랍 고개를 잇는 1948㎞ 길이의 카라코람 하이웨이(국도 314번)에서 바라본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의 국경 와칸 계곡의 끝자락. [사진 위키피디아]

실크로드의 십자로 아프간은 불교로 중국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어 군대가 부딪쳤다. 747년 당 현종(玄宗)이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에게 기병과 보병 1만을 주며 파미르 원정을 명했다. 당과 경합하던 티베트 강국 토번이 세력을 넓혀 당의 서역 경영을 방해하자 내린 결정이다. 지금의 신장(新疆) 쿠차에 있던 안서도호부를 출발한 고선지는 카쉬가르와 타쉬쿠르간을 지나 아프간의 와칸(호밀), 파키스탄 접경인 길기트(소발률), 발루치스탄(대발률)을 차례로 정복했다. 와칸 남쪽 길기트에서는 왕과 부인인 토번 공주까지 포로로 잡았다. 고선지는 승전보를 상관을 무시하고 황제에게 직보했다. 화가 난 상관이 고선지에게 “개의 창자를 먹는 고려노(高麗奴)”라 욕했다고 『구당서』가 기록했다.

파미르 승전의 공으로 안서사진 절도사(총독)에 임명된 고선지는 751년 중국 세력에 맞선 아랍 아바스 왕조 연합군과 아프간 북쪽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에서 맞붙었다. 탈라스 전투는 당 제국의 진로를 바꿨다. 안사의 난이 이어지며 쇠락이 시작됐다. 중앙아시아에서 중국 영향력은 쇠퇴하고 이슬람이 휩쓸었다. 티베트가 세력을 확장했고 톈산 북방 초원은 투르크계 민족이 장악했다. ‘제국의 무덤’ 아프간에 당 제국이 첫 희생양이 됐다.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다시 와칸 계곡을 지났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의 맹주로 휩쓸 때다. 1271년 베네치아에서 출발한 마르코 폴로는 “보칸(Vocan, 지금의 와칸)이라 불리는 사방이 사흘 거리밖에 되지 않아 그리 크지 않은 지방에 도착했다”며 “주민은 마호메트를 신봉하고 나름의 언어를 갖고 있으며 내로라하는 전사들”이라고 『동방견문록』에 기록했다. 이슬람이 바미얀의 불교 문화를 대체했다. 탈라스 전쟁의 결과다.

아프가니스탄 와칸회랑.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아프가니스탄 와칸회랑.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탈레반의 귀환은 탈라스 전쟁을 되살린다. 중국 싱크탱크 안바운드의 설립자 천궁(陳功)은 미국 외교·안보 전문지 디플로맷에 최근 ‘당 왕조와 아프간, 제국의 무덤’이란 기고문을 싣고 “고대 실크로드를 부활시키려는 중국의 비전, 즉 ‘일대일로(육·해상 신 실크로드)’는 아프간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라시아 대륙을 섬에 비유하면 심장부는 중국·러시아·인도와 같은 주변부 강대국이 아닌 아프간이라며, 아프간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 대륙의 지배적 영향력을 갖는다고 했다. 이어 “미군의 아프간 철수는 8세기 당 제국의 철수와 마찬가지로 구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고 강조한다. ‘아프간=제국의 무덤론’을 당 제국으로 확대했다.

아프간의 전략적 가치는 1979년 소련의 침공 당시 중국의 공식 성명에 잘 나온다. 그해 12월 31일 자 인민일보에 실린 규탄 성명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인도양으로 남하해 해상 통로를 통제하기 위한 절차이자 석유 생산지를 착취하고 유럽을 우회 포위하며, 세계 패권을 도모하려는 전략”이라고 풀이했다. 사설은 “소련의 군사 점령은 히틀러식 ‘신질서’일 뿐, ‘외세 위협을 물리쳤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적반하장”이라고 비난했다.

영국에 이어 소련은 아프간 침공 10년 뒤 퇴각했다. 미국은 20년이 걸렸다. 중국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왕원빈(王文斌) 외교부 대변인은 1일 “아프간은 영웅의 나라, 역사상 굴복한 적이 없다. 중국은 아프간에 손해를 끼칠 생각이 없고, 아프간 역시 중국에 손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는, 1964년 11월 마오쩌둥이 베이징에서 모하마드 자히르 샤 아프간 왕을 접견하며 남긴 어록을 인용했다. 마오가 당의 좌절까지 염두에 둔 발언은 아니었을 듯하다.

아프간의 길쭉한 와칸 계곡에 지난 10년간 미국은 50㎞의 도로를 닦았다. 와칸은 ‘일대일로’로 부활할 것인가? 아니면 중국의 화약고 신장을 찌르는 단검이 될까? 일단 압둘 살람 하나피 탈레반 정치국 부장(副長)은 2일 우장하오(吳江浩)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와 통화에서 일대일로 참여를 희망했다.

하지만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탈레반이 국제사회와 공조하는 낙관적 시나리오와, 공포 통치와 내전 격화로 난민·테러·마약이 인접국으로 번지는 비관적 시나리오는 여전히 모두 가능하다”며 “신장 독립을 노리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이라는 중국의 역린을 아는 탈레반과 이슬람국가-호라산(IS-K)은 모두 중국에 부담”이라고 지적한다. 중국이 와칸은 군대로 막을 수 있겠지만, 타지키스탄과 파키스탄을 우회하는 유입까지 막으려면 ‘일대일로’ 역시 주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와칸 계곡

와칸 회랑으로도 불리는 아프간 북동부의 동서 400㎞, 남북 13~30㎞의 좁고 긴 계곡 지형. 고대 실크로드의 십자로로 현장·혜초·고선지·마르코 폴로 등이 지나갔다. 미국이 아프간 재건의 목적으로 와칸에 500만 달러를 투자해 50㎞의 도로를 건설 중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