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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by 윤휘곤

중앙일보

입력 2021.09.05 13:07

업데이트 2021.09.05 14:16

팩플레터 136호, 2021. 09. 02
'목요 팩플' view입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드리는 익명의 벤처투자자 '윤휘곤'씨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윤휘곤씨는 지난달 칼럼(나의 유니콘 감별법)에서 '뭘 보고 투자하느냐'는 질문에,  창업자가 세상을 설득할 수 있는지 그 역량을 본다고 했었죠. 구독자들께서 현업 전문가의 솔직한 얘기를 반가워해주셨는데요. 오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려 합니다.

투자자들은 창업자의 학력(혹은 학벌)을 따질까요, 안 따질까요? 요즘 세상에 우문인가요? 이 질문을 던져보는 이유는 IT 분야에 유독 국내외 명문대 출신 창업가들이 많은 편이어서입니다. 스타트업의 성공에는 창업가의 비전을 믿고 기다려주는 투자자의 역할이 크다는데, 투자자 판단에 창업가 학력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창업자 출신 유명 투자자의 경우, 창업자의 학벌을 많이 본다는 얘기도 한때 있었고요. 톡 까놓고 얘기하긴 조심스러운 주제를 오늘 윤휘곤 칼럼이 다뤄 봅니다.

Today's Topic
창업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네? 무용이요?”
그녀는 분명하고 당당하게 답했지만, 질문했던 쪽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자자들이 으레 묻곤 하는 ‘학교에선 어떤 분야를 공부하셨나요?’란 질문에, 돌아온 답이 ‘무용이요. 저는 발레를 전공했습니다’였기 때문이다. 예상밖의 답변에 투자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온라인 게임 개발사의 대표라면 컴퓨터공학, 전자공학, 전산학 등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무용 전공 창업자란 얘길 들은 투자자는 투자 검토를 중단했다고 한다. 온라인 게임 회사로 투자 커뮤니티로부터 한창 주목 받던 기업이었는데도 말이다. 2000년 가을 어느날 서울의 한 벤처캐피털(VC) 회의실 장면이다. 만약에 그때 주저없이 투자했다면 무려 40배의 투자 수익을 낼 수 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당시 왕성하게 투자하던 그 VC 파트너들은 창업가의 학력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에 갇혀 있었다. 이른바 ‘SKY+KP’(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KAIST, Postech)는 졸업했어야 닷컴 기업의 창업 CEO 자질을 갖춘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스타트업의 CFO(최고재무책임자)라면 미국 유수 대학 MBA 학위 정도는, CTO(최고기술책임자)라면 SKY+KP에서 이공계를 전공한 박사 학위 정도는 갖고 있어야 투자를 검토했다고 한다. 그래서 물어봤다. ‘그런 스타트업만 골라서 투자해보니, 그 결과가 어땠냐’고. 그는 비장한 어투로 ‘그건 비밀’이라고 했다. 투자수익률을 밝힐 수 없는 투자란, 대부분은 실패한 투자에 가깝다.

세계 최고의 '고졸' 부호들 

창업자의 학력, 혹은 학벌. 창업국가 미국에서도 이 주제는 종종 화제가 된다. ‘스타트업의 성지’ 실리콘밸리의 성공 요인을 꼽을 때 우선 거론되는 건, 그 지역에 위치한 세계 최고 명문대, 스탠포드대와 UC버클리다. 그런 실리콘밸리에서도 최종학력 고졸인 창업가들이 드물지 않다. 다음 리스트는 프로필 상 최종학력 고졸인 미국 창업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10명이다.

1.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2. 래리 엘리슨, 오라클 창업자
3.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4. 마이클 델, 델 창업자
5. 폴 앨런,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
6.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7. 얀 코움, 왓츠앱 공동창업자
8. 잭 도시, 트위터 공동창업자
9. 숀 파커, 냅스터 창업자, 페이스북 초대사장
10. 에반 윌리엄스, 트위터 공동창업자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이 리스트엔 함정이 있다. 10명 중에서 진짜 고졸은 냅스터 창업자인 숀 파커 한 명뿐이다. 나머지 9명은 대학에 입학은 했으나 창업의 길로 나서면서 학교를 그만둔 경우다. 그것도 대부분 명성이 자자한 명문대 문턱을 넘은 수재 혹은 천재들이다.

보통 좋은 학교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은 대체로 성실하다고 평가받는다. 창업 같은 특별한 도전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지적 수준을 갖췄다고 자랑할 수도 있다. 또 학벌의 부수적인 수혜라면 다름 아닌 ‘인적 네트워크’다. 동문 수학한 친구나 선후배는 창업가에겐 잠재적인 인적 자산이다. 그렇다면 ‘역시 창업은 아무나 못하는 것’이며, ‘적어도 명문대 입학쯤은 너끈히 할 수 있는 엘리트여야 창업할 수 있다’는 결론인가. 무용 전공자가 사업가로 성공하거나, 냅스터의 숀 파커 같은 사례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일 뿐인가.

학력이 절대적인 분야도 있다

사실 학력은 창업의 중요한 토대이긴 하다. 문제는 어떤 영역의 창업이냐에 달렸다. 기술이 중심인 창업에서 창업가들의 학력은 중요하다. 반도체를 개발하고,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만들고, 데이터 분석을 하고, 보안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표적 항암제를 개발하고, 저궤도위성 통신망을 개발하겠다는 기업에 대한 투자를 검토해야 하는데, 창업자들의 학력과 연구 성과를 들여다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창업 계기는 대체로 학업과 연구의 성과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최종학력이 고등학교 졸업인 실리콘밸리의 부호들. 이들을 다 모은 졸업 앨범이 이런 모습일까. 그래픽=정다운 인턴

최종학력이 고등학교 졸업인 실리콘밸리의 부호들. 이들을 다 모은 졸업 앨범이 이런 모습일까. 그래픽=정다운 인턴

창업자의 학력이 투자 결정의 절대적인 기준이던 때가 있었다. 기술 창업의 원시림과도 같은, 초기 실리콘밸리가 그랬다. 1960~70년대는 주된 창업 아이템이 대학과 연구소의 연구·과제에서 발원된 경우가 많았다. 이 흐름은 1980~9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 창업가들의 면면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등 일부 대학 중퇴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이른바 ‘고도 기술 인재들’이었다.

그런데 이 고학력 창업 생태계에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인터넷’ 때문이다. 인터넷은 창업 분야를 무한 확대시켰다. 기술 창업을 넘어 전 산업의 뿌리가 뒤흔들렸다. 엘리트 중심으로 폐쇄적이던 창업 생태계 역시 자연스레 오픈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이라는 막강한 네트워크가 확산되자, 다양한 서비스 기반 스타트업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서비스업의 성패는 학력과 무관하다. 21세기형 스타트업이 20세기형 스타트업에 비해 더 다양하고 색다른 창업가를 많이 배출하는 이유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나온 인재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21세기의 창업 생태계에서 명문대 졸업장은 창업 성공의 보증 수표가 결코 아니다.

왜 그런가. 현재 학교 교육의 커리큘럼을 냉정하게 들여다 보자. 몇몇 과학과 기술 분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교육은 과거의 지식을 잘 정리하고 평가하고 분석하는 수준이다. 경영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대부분이 그러하고, 이공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돈된 지식을 익혀 학점을 잘 얻는 역량은 점점 예술의 경지에 이르고 있는 창업에서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창업, 스포츠와 예술을 닮아간다

그렇다. 이제 창업은 예술이나 스포츠의 영역과 닮아가고 있다. 요즘 시대에 창업가의 학력을 따지는 건, 마치 영국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의 최종 학력을 묻는 것 같은 우문이다. 작년 프리미어리그 득점 1위인 해리 케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축구 선수들은 최종 학력이 중졸이다. 토트넘의 손흥민도 동북고 중퇴가 최종 학력. 어디 프리미어리그만 그럴까. MLB, NBA, NFL 등 프로 스포츠 리그 대부분은 학력보다는 실력 중심으로 바뀐 지 오래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서양 클래식 음악 대가들은 어땠을까.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 라흐마니노프 등의 음악을 들으며 그들이 어느 학교 나왔는지 궁금할 사람은 별로 없다. 현대의 대중음악도 그렇다. BTS나 레이디 가가 같은 글로벌 팝스타의 학력을 누가 궁금해하나. 대입 합격이 아니라, 실력 그 자체로 경쟁해 명예와 부를 얻는 영역에서 명문대 졸업장은 의미가 없다.

글로벌 시장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최종 학력과 무관하게 창업혼(創業魂)을 불태웠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 등 어린 나이에 명문대를 뛰쳐나와 기업가정신을 실행에 옮기는 도전에 나섰다. 마치 일찌감치 학교를 그만두고 자기 분야에 몰입해 압도적 실력을 키운 스포츠 스타나 예술가들처럼.

팩플레터 136호. 그래픽=정다운 인턴

팩플레터 136호. 그래픽=정다운 인턴

21세기형 창업엘리트

투자업계에 있다보니 많은 창업자들을 만난다. 다수 평범한 창업가들은 여전히 기존 경영학 교과서에 나오는 경쟁분석, 전략분석 등을 사업 계획서에 써 놓는다. 의미가 없다. 그런 낡은 지식들을 머리에 담고 이론적으로 혁신을 꿈꾼 기업들은 다 망했거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코닥, 모토로라, 노키아 등 20세기 혁신의 아이콘 기업에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있었겠는가. 영광의 역사를 딛고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낸 21세기의 창업가들은 낡은 경영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

창업이라는 도전은 결국 둘 중 하나다.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거나, 혹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새롭게 만들거나. 검색엔진을 만든 구글이 전자라면, 인터넷에서 상거래 판을 벌린 아마존은 후자다. 교과서에는 이런 종류의 도전에 대한 정답의 실마리조차 없다. 학교에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을 새롭게 만드는 일을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투자를 검토하다보면, 학력 혹은 학벌에 대한 한국 창업가들의 인식을 엿볼 기회가 있다. 한국의 창업가들은 여전히 자신의 프로필을 사업 계획서나 회사 소개 자료의 앞부분에 둔다. 반면에 글로벌하게 성공하는 창업가들은 대부분 자기 소개를 문서의 뒷부분에 서술한다. 이런 차이를 지켜보며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든다. ‘이만한 학력으로 실력을 검증받았으니, 나는 이러저러한 사업을 잘 할 수 있다’고 설명하려는 쪽과, ‘내가 사업을 하려는 이유는 이렇고, 이러저러하게 실행해 나갈 것이며, 나를 비롯한 나의 동료들은 그것을 잘 해낼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하는 쪽. 현명한 투자자라면 어느 쪽에 마음이 기울까.

창업가에겐 ‘무엇을 왜 하려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을 투자자와 소비자가 납득할 수 있게, 잘 설득할 수 있다면 창업가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런 사례가 최근 국내에서도 눈에 띄게 늘고 있어 참 다행이고 반갑다. 가령, 배달의민족 김봉진 의장이나 야놀자의 이수진 총괄대표 같은 창업가들은 성공 방정식을 스스로 만든 사람들이다. 한국 사회가 꼽는 명문대 출신은 아니지만, 세상이 풀지 못한 문제를 누구보다 먼저 발견했다. 또 이미 존재하던 시장을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해냈다. 그야말로 21세기형 창업 엘리트들이다. 최근 한국에 글로벌 투자자들이 몰려드는 데엔 이들의 공이 작지 않다. 또다른 김봉진과 이수진을 나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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