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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못했다" 4표에 무너진 法숙원…그뒤엔 '친정 킬러' 이탄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법원조직법 개정안 부결을 주도한 이탄희 민주당 의원. 오종택 기자

법원조직법 개정안 부결을 주도한 이탄희 민주당 의원. 오종택 기자

지난달 31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선 21대 국회들어 처음으로 부결 법안이 나왔다. 2011년 법조일원화 조치로 2026년부터 10년으로 늘어나도록 입법돼 있는 경력 판사 임용조건을 현행 수준(5년)으로 묶어두자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이다. 재석 의원 229명 중 111명이 찬성했지만 반대(72명)와 기권(46명)이 그 이상 쏟아져 의결정족수(재적 의원 299명 중 과반 출석, 출석 의원 중 과반 찬성)를 채우지 못했다. 4표가 모자랐다.

지난해 5월 180석 거여 독주 체제로 개원한 이래 60차례 열린 본회의에서 1000건의 법안이 가결되는 동안 부결된 것은 이 법안이 유일했다. 더불어민주당 원내지도부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한병도 원내수석)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같은 취지의 법안들이 지난 5~6월 쏟아진 뒤 대안 마련 과정을 거쳐 여야 합의로 7월15일 법제사법위원회 1소위→8월24일 법사위 전체회의를 초고속으로 통과했던 터라 부결은 더 의외였다.

엇갈린 ‘사법개혁’ 동지들

지난달 31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된 법원조직법 개정안 표결 내용. 국회방송 캡처

지난달 31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된 법원조직법 개정안 표결 내용. 국회방송 캡처

거여의 분열이 부결의 원인이었다. 표결에선 법관탄핵을 주도했던 강경파들도 엇갈렸다. 진보성향 법관 단체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인 이탄희 의원은 반대했고 이수진 의원은 찬성표를 던졌다. 우리법연구회 회장 출신인 최기상 의원도 찬성 쪽이었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그룹도 찬성(박주민·김남국 의원)과 반대(김승원·황운하 의원)로 나뉘었다. 사법 관련 이슈에서 민주당 내 강경파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도 처음이다.

무너진 법원행정처의 숙원

법안은 의원입법 형식으로 제출됐지만 법원조직법 개정은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의 숙원 사업이었다. 대법원 산하 연구기관인 사법정책연구원은 지난 2월 신임 법관 155명(응답 118명), 전국법관대표회의 법관대표 125명(응답 76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뒤 “‘법관 경력요건 10년 이상은 부적절하다’는 답변이 신입법관 83%, 법관대표 73.7%에 달했다”고 밝히면서 군불을 땠다. 법안 발의 후인 지난 6월 법원행정처는 “법조일원화 제도가 도입된 뒤 법관 임용에 상당한 제한이 초래되고 있다”는 내용의 공문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보냈다. 법원행정처 직원들은 법사위 소속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취지를 설명했다. 법사위원의 한 보좌관은 “마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상고법원 로비가 재연되는 듯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사건을 고리로 박근혜 정권에 공세를 폈었다. 연합뉴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사건을 고리로 박근혜 정권에 공세를 폈었다. 연합뉴스

법원의 우려는 변호사 시험 성적 우수자와 로클럭(재판연구원) 출신자들의 누수 현상에 놓여있다. 익명을 원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지금도 변시 성적 우수자들은 경력 요건이 없는 검찰이나 고임금을 보장하는 대형로펌을 선호한다”며 “요건이 10년 경력으로 강화되면 젊고 우수한 인재들이 더는 판사를 지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의 걱정은 일부 법사위원들을 움직였다. 7월 15일 법사위 법안심사1소위에서 이수진 의원은 “(임용기준 완화가) 재판서비스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고, 법관 신뢰도도 떨어질 것이 걱정”이라면서 “현실적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찬성표를 던진 한 법사위원은 “10년 경력 변호사는 로펌에서 ‘파트너’급으로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다. 연봉도 적고 노동강도는 센 판사로 전직하려는 잘 나가는 변호사가 몇이나 되겠느냐”며 “사법개혁의 취지가 흔들릴 수 있지만 현실적 문제도 고려해야 했다”고 말했다.

판사 출신 이탄희의 친정 저격

그러나 민주당 지도부는 이 법안을 8월 처리 주요 법안 리스트에는 올렸지만 당론으로 채택하진 않았다. 민주당 원내 핵심 관계자는 “법조 현실은 깊이 이해하는 의원이 적은 데다 의견도 분분해 당론으로 채택하긴 적절치 않았다”고 말했다.

지도부가 열어놓은 공간 속으로 반대 행렬을 이끈 건 이탄희 의원의 친정 저격이었다. 본회의를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 의원총회에서 이 의원은 공개적으로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지난달 31일 본회의에서도 반대 토론에 나서 “임용 경력을 5년으로 퇴보시키면, 법원은 변호사 시험 성적이 좋은 사람들을 로클럭으로 ‘입도선매’하고 대형로펌은 향후 판사로 점지된 이들을 영입하기 위한 경쟁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이 개정안이 공론화 절차 없이 3개월 만에 본회의장에 올라오는 특혜를 누린 것은 법원행정처 현직 판사들의 입법 로비 덕분”이라며 “‘양승태 법원행정처’와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느냐”라고 주장했다. 반대표를 던진 한 초선 의원은 “법조인이 아니라면 관심을 갖기 어려운 법안이지만 ‘양승태 사법 농단’이 떠올라 찬성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법안이 부결되면서 현실적 숙제는 그대로 남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재선 의원은 “재판의 질은 국민들의 권리 보호와 직결되는 문제”라며 “경륜과 실력을 겸비한 법조인들을 법원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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