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항공기 5대 동시에 뜬다, 美보다 4배 빠른 英항모의 비결[박용한 배틀그라운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일 동해 남부 해상에서 훈련 중인 영국 해군 퀸 엘리자베스 항공모함을 다녀왔다. 4시간 동안 항모 곳곳을 살피며 꼼꼼하게 뜯어봤다. 10년 후 진수될 한국 경항모를 미리 만나볼 수 있었다. 퀸 엘리자베스함(항모)은 전통적인 해양 강국인 영국의 최신 기술로 건조돼 2017년 취역했다.

부산 해군 작전사령부에서 영국 머린 헬기를 타고 한국 근해에서 훈련 중인 영국 퀸 엘리자베스 항모에 내렸다. 박용한

부산 해군 작전사령부에서 영국 머린 헬기를 타고 한국 근해에서 훈련 중인 영국 퀸 엘리자베스 항모에 내렸다. 박용한

이날 부산 해군 기지를 출발하는 건 쉽지 않았다. 구름이 낮고 해무가 가득했다. 항모가 작전 중인 바다에는 비바람도 몰아친다고 보고됐다. 한국 해군 UH-60 블랙호크 헬기는 뜨지 못했고, 영국 AW101 머린 헬기에 올라탔다.

바다 위로 비행하기 때문에 구명조끼를 목에 걸었다. 저산소 상황에 대비해 산소 호흡기도 허리춤에 찼다. 항모 갑판을 이동할 때 항공기가 만들어내는 바람은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 고글도 착용했다.

영국 퀸 엘리자베스 항모에서 영국 공군 F-35B 전투기가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가운데 갑판에 고인 빗물을 몰아내며 출격하고 있다. 박용한

영국 퀸 엘리자베스 항모에서 영국 공군 F-35B 전투기가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가운데 갑판에 고인 빗물을 몰아내며 출격하고 있다. 박용한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헬기를 타고 30여분 날아갔다. 멀미가 느껴지던 그때 창밖으로 큰 덩치가 보였다. 항모는 6만 5000tㆍ길이 280mㆍ폭 70m 크기로 10만t 규모 미국 항모보다 작고 4만 5000t으로 건조될 한국 경항모보다는 크다.

머린 헬기는 천천히 항모 왼쪽에서 접근했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자칫 바다로 추락할 수도 있어 긴장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착함 순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악천후 속에서도 경험 많은 조종사는 탁월한 실력을 보여줬다.

영국 퀸 엘리자베스 항모의 항공 통제소에서 항모 갑판이 모두 내려다 보인다. 박용한

영국 퀸 엘리자베스 항모의 항공 통제소에서 항모 갑판이 모두 내려다 보인다. 박용한

함정 실내로 이동해 흠뻑 젖은 구명조끼와 안전모를 내려놓고 견학을 시작했다. 먼저 항모를 움직이는 함교에 올라 항모를 내려봤다. 영국 해군 관계자는 “30초 뒤 F-35B 전투기가 출격한다”며 갑판을 가리켰다.

동해 바다 ‘작은 점’ 근접하니 대형 항모

F-35B 수직이착륙기는 굉음을 내며 스키점프대로 향해 150m를 5초 만에 질주하더니 이내 하늘에 올랐다. ‘리프트 팬(Lift Fan)’이 아래에서 위로 올려주는 힘과 전투기 엔진이 밀어내는 추력을 동시에 받아 짧은 거리를 달려 기체를 공중에 띄웠다.

영국 퀸 엘리자베스 항공모함 구조도. 갑판 아래 항공기를 보관하는 격납고가 위치한다. 항모를 운용하는 함교(앞)와 항공기를 통제하는 함교가 분리돼 있다. 타임즈

영국 퀸 엘리자베스 항공모함 구조도. 갑판 아래 항공기를 보관하는 격납고가 위치한다. 항모를 운용하는 함교(앞)와 항공기를 통제하는 함교가 분리돼 있다. 타임즈

항모는 처음부터 F-35B 탑재를 준비하며 용골 등을 설계했다. F-35B는 최대 36대 탑재할 수 있다. 갑판 아래 격납고에는 효율성을 고려해 22대 정도만 싣는다. 격납고에서는 엔진 교체를 비롯해 지상과 같은 수준으로 정비도 가능하다.

F-35 계열 스텔스 전투기는 적과 아군의 레이더로 탐지하기 어렵다. 아군은 전투기가 보내 준 비행 정보 덕분에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작전 반경도 넓어 16대가 기존 함재기 42대 역할을 한다.

헬기 옆을 스치듯 지나친 뒤 갑판으로 이동해 수직으로 착함하는 F-35B 전투기. 박용한

헬기 옆을 스치듯 지나친 뒤 갑판으로 이동해 수직으로 착함하는 F-35B 전투기. 박용한

F-35B 전투기는 천천히 함미 쪽에 접근해 왔다. 바로 아래에는 회전 날개가 빠르게 돌고 있는 헬기가 출격을 준비하는 상황이지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영상을 한국군 조종사에게 보여줬다. “매우 위험한 비행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항모, 사실상 활주로 5개 싣고 다녀

이내 스치듯 항모 왼쪽으로 다가오더니 갑판 상공으로 들어와 제자리 비행을 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느껴졌다. 리프트 팬이 만들어낸 바람이 갑판에 고인 빗물을 거세게 몰아내며 내려앉았다. 곧장 다시 출발선으로 이동했다. “한 번 더 보여주겠다”는 영국군 관계자의 말이 떨어지자 바로 출격했다.

영국 항모 엘리베이터 올려진 미 해병대 F-35B 전투기가 내부 격납고에서 갑판으로 이동하고 있다. 영 해군

영국 항모 엘리베이터 올려진 미 해병대 F-35B 전투기가 내부 격납고에서 갑판으로 이동하고 있다. 영 해군

항모 다섯 군데에서 동시에 항공기가 뜨고 내릴 수 있다. 사실상 활주로 5개를 싣고 다니는 효과를 본다.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최대한 빨리 전투기가 뜰 수 있도록 조종사 생활 습관과 동선까지도 항모 설계에 반영했다. 전시에 하루 72소티(출격/임무)까지 가능한 배경이다.

영국의 앞선 건조 능력도 한몫했다. F-35B 전투기가 뜨고 내려앉을 때 갑판 온도는 1200℃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불과 30초 만에 이전 수준으로 내려간다. 갑판을 비우지 않고 작전을 이어갈 수 있는 비결이다. 한국은 아직 갖지 못한 기술이다.

장교가 휴식을 하는 사관실에는 피아노와 체스판, 안락한 소파가 마련돼 있다. 박용한

장교가 휴식을 하는 사관실에는 피아노와 체스판, 안락한 소파가 마련돼 있다. 박용한

정비를 마친 항공기는 빠르게 다음 비행에 나설 수 있도록 설계됐다. 비행을 마친 항공기는 함미 쪽 리프트에 실려 60초 만에 갑판 아래 격납고로 이동한다. 여기서 정비를 마친 항공기는 함수 쪽 리프트를 타고 갑판으로 올라온다.

항공기가 이동하고 정비하는 모든 과정은 실시간 파악된다. 자동화·전자화한 항공기 정보 공유 체계를 갖췄다. 항공기 정보는 무선으로 실시간 연동돼 있다. 어떤 항공기를 투입해야 하는지, 언제부터 다음 임무 비행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지 손쉽게 판단할 수 있다.

2008년 인도양 부근에서 훈련 중인 미 해군 레이건 항모에서 항공기 비행을 통제하고 있다. 미 해군

2008년 인도양 부근에서 훈련 중인 미 해군 레이건 항모에서 항공기 비행을 통제하고 있다. 미 해군

덕분에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하다. 야구 경기에서 감독이 구원 투수로 어떤 선수를 낼 것인지 언제부터 준비하도록 지시하는 게 중요하듯 항공기 투입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여전히 사람보다 더 큰 항모 모형도 위에 항공기 모형 자석을 움직이며 비행 정보를 볼펜으로 적고 지우며 수작업으로 통제한다.

첨단 기술 적용해 병력 줄이고 예산도 절감 

항모 운용 요원이 갑판 위에 이물질이 없는지 살펴보고 있다. 박용한

항모 운용 요원이 갑판 위에 이물질이 없는지 살펴보고 있다. 박용한

효율화는 인력 감축을 뜻하며 이는 운용 비용 절감으로 이어진다. 영군 해군은 미군 기준 3분의1 병력만 쓴다. 운용하는 항공기는 약 50여대, 병력은 1400여명(항공 700, 함정 700명)이다.

함재기 90여대를 운용하는 미 해군 항모 레이건함 장병 5000명보다 크게 적다. 영국은 다양한 정비를 할 수 있도록 숙달시켜 정비사 규모를 크게 줄였다.

퀸 엘리자베스 항모에서 F-35B 전투기에 무장을 장착하고 있다. 영 해군

퀸 엘리자베스 항모에서 F-35B 전투기에 무장을 장착하고 있다. 영 해군

탄약 관리 자동화 및 무장 탑재 분업화로 전투기 무장 속도는 미군보다 4배 정도 빠르다. 자판기에서 뽑듯 컨테이너에 포장된 미사일을 꺼내 탄두와 조립한 뒤 리프트로 갑판에 올려보낸다. 갑판에서는 전투기에 미사일을 장착한다. 기존 영국 항모보다 무장 임무 병력 250명을 감축한 배경이다.

함정 관리도 자동화 체계를 갖췄다. 무인기 운용 등 미래 변화에 대비해 충분한 전력 생산 능력을 만들어 놨다. 함정은 한 번 건조하면 50년 동안 쓴 뒤 임무를 마치기 때문이다. 가스터빈 2개와 디젤엔진 4개로 109MW 전력을 만든다. 지상에서 15만명이 동시에 쓰는 전력량이다.

민홍철 국회 국방위원장을 비롯한 국회 대표단이 지난달 30일 영국 항공모함 퀸 엘리자베스함을 방문해 격납고에 보관된 머린 헬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승균 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제리 키드 영국함대사령관, 민홍철 위원장, 박진 의원, 김석기 의원, 스티브 무어하우스 영국항모전단장, 박은하 부산시 자문대사,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 해군

민홍철 국회 국방위원장을 비롯한 국회 대표단이 지난달 30일 영국 항공모함 퀸 엘리자베스함을 방문해 격납고에 보관된 머린 헬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승균 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제리 키드 영국함대사령관, 민홍철 위원장, 박진 의원, 김석기 의원, 스티브 무어하우스 영국항모전단장, 박은하 부산시 자문대사,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 해군

항모는 함교 두 개를 갖고 있다. 전방 함교에서 함정을 움직이고 후방 함교는 항공기 작전을 통제한다. 전방 함교가 파괴되면 후방 함교에서도 항모 조타를 할 수 있다. 후방 함교 항공 통제소 옆으로 이동하니 함정을 움직일 수 있는 작은 함교가 마련돼 있다.

함정의 각 층으로 이동하는 계단은 올라가는 계단과 내려가는 계단이 구분됐다. “긴급한 상황에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분리했다”고 영국 해군 관계자는 설명했다.

통로에 설치된 런던 도로명. Andrew Matthews/PA Wire

통로에 설치된 런던 도로명. Andrew Matthews/PA Wire

복잡한 미로와 같은 함정 내 통로마다 런던과 에든버러의 유명한 도로명이 붙여져 있다. 오랜 기간 항모를 운용한 영국 해군의 경험은 소소한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다를 지배했던 영국의 경험은 경항모 건조 및 운용 계획을 준비하는 한국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민홍철 국회 국방위원장은 지난 1일 열린 ‘제15회 국제해양력심포지엄’ 축사에서 지난달 30일 영국 항모를 다녀온 소회를 밝히며 “우리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항모 필요하고, 건조할 시기와 충분한 조건이 됐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