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이 연봉 1억, 변호사도 제쳤다…브렉시트 英서 뜬 직업

중앙일보

입력 2021.09.05 05:00

영국의 저가 항공사 부조종사였던 아론 레벤탈(37)은 코로나19 여파로 회사가 파산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그가 생계를 위해 택한 두 번째 직업은 대형트럭 운전사다. 영국과 유럽연합(EU)국을 오가며 식재료 등을 운반하는데, 장거리 이동이 많아 몸이 고되다. 대신 연봉이 올랐다. 현재 그의 연봉은 4만 파운드(약 6400만 원). 조종사 때보다 1만 파운드(1600만 원) 더 번다.

지난해 12월 프랑스가 변종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영국발 입국을 금지하자 영국 남동부 맨스턴 공항 활주로에 컨테이너 트럭들이 빼곡하다. [AFP]

지난해 12월 프랑스가 변종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영국발 입국을 금지하자 영국 남동부 맨스턴 공항 활주로에 컨테이너 트럭들이 빼곡하다. [AFP]

영국에서 대형트럭 운전자가 귀한 몸이 됐다. 지난달 말 BBC·더 타임스 등 현지 언론은 영국 유통·운송업체들이 겪는 대형트럭 운전자 품귀 현상을 잇달아 보도했다. 현지 언론을 종합하면 업체들은 고위 간부보다도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운전자 모셔가기’에 애쓰고 있다.

더 타임스에 따르면 테스코와 모리슨 등 대형 슈퍼마켓과 거래하는 물류업체 ‘지스트’는 최근 운전자에게 연봉 5만6674파운드(9000만원)를 제시했다. 이는 이 회사 고위직을 비롯해 영국에서 고연봉 직업으로 꼽히는 재무분석가와 변호사의 평균 연봉 4만 파운드(6400만원)를 훌쩍 뛰어넘은 수준이다.

지난 1월 브렉시트 직후 영국 아일랜드 남동부의 로슬레어 항구에 대형 화물 트럭들이 얽혀서 멈춰있다. 브렉시트 이후 복잡해진 출입 절차로 지연되는 상황. [AFP=엽합뉴스]

지난 1월 브렉시트 직후 영국 아일랜드 남동부의 로슬레어 항구에 대형 화물 트럭들이 얽혀서 멈춰있다. 브렉시트 이후 복잡해진 출입 절차로 지연되는 상황. [AFP=엽합뉴스]

영국 슈퍼마켓 체인 ‘웨이트로즈’도 화물차 운전자 채용 공고에 창업 이래 최고 금액인 연봉 5만3780파운드(8600만원)를 제시했다. 신규 채용자에게는 보너스 1000파운드(160만원)와 멤버십 라운지 무료입장 등 각종 복지 혜택도 내걸었다.

트럭 운전자 전문 양성업체 ‘HGVT‘ 최고경영자 제임스 클리포드는 “신입이라도 일 년에 6만 파운드(9600만원) 이상 벌 수 있다”며 “트럭 운전자들이 왕족 취급을 받고 있다. 엄청난 연봉이 제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브렉시트·코로나·열악한 노동환경…삼중고

이런 트럭 운전자 연봉의 고공행진 뒤에는 인력난이 자리 잡고 있다. BBC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영국 내에서만 약 9만~10만 명의 인력 공백이 생겼고, 유럽 전역에서는 약 40만 명에 달하는 트럭 운전자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불가리아 국적의 대형트럭 운전자 디미타르 벨리노프(74). 수십 년 동안 영국과 EU국을 오가며 상품을 운반한 그는 지난해 12월 AFP와의 인터뷰에서 브렉시트 후 이 직업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AFP=연합뉴스]

불가리아 국적의 대형트럭 운전자 디미타르 벨리노프(74). 수십 년 동안 영국과 EU국을 오가며 상품을 운반한 그는 지난해 12월 AFP와의 인터뷰에서 브렉시트 후 이 직업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AFP=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지난해 연이어 터진 두 가지 사건, 영국의 EU 탈퇴인 ‘브렉시트’와 코로나19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브렉시트가 직격탄으로 꼽힌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 EU 국경을 넘나드는 일이 예전과 다르게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BBC에 따르면 브렉시트가 시행된 지난 1월 1일부터 약 3개월간 EU를 오가는 관문인 켄트 터미널에서 출입국 서류 미제출로 벌금을 부과받은 트럭은 2000건, 거둬들인 벌금이 63만8000파운드(10억 원)에 달한다. 모두 트럭 운전자들이 부담한 비용이다. 해외 인력의 경우 영국 내 체류를 위한 별도 허가도 받아야 한다.

까다로운 출입국 절차와 체류 문제에 외국인 노동자들은 줄줄이 이탈했다. EU 운송협회 자료에 따르면 브렉시트 시행 전후로 약 5만명의 트럭 운전자가 영국과 EU를 오가는 일을 그만뒀다. 더 타임스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을 떠난 유럽인 트럭 기사 1만4000여명 가운데 다시 돌아온 기사는 600여명에 그쳤다. 영국 기업 ‘영스’의 롭 홀리만 이사는 “터무니없고 불필요한 절차 때문에 트럭 운전자들이 떠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셰르부르 항구에서 아일랜드 로슬레어 항구로 가는 페리 승선을 기다리는 트럭들. [EPA=연합뉴스]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셰르부르 항구에서 아일랜드 로슬레어 항구로 가는 페리 승선을 기다리는 트럭들. [EPA=연합뉴스]

그동안 고질적인 문제로 꼽혔던 열악한 노동 환경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트럭 운전사들은 하루9~10시간을 운전하며 차 안에서 잠을 자고, 휴게소 화장실을 이용한다. 트럭 운전자 평균 연령은 55세로 높은 편이다. 워낙 노동 강도가 높다 보니 젊은이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운송 회사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보장한다”고 광고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고 데일리메일은 전했다.

크리스마스에도 문 닫을 판…최대 피해는 소비자

트럭 운전자 부족에 애가 타는 건 소매점도 마찬가지다. 손님이 찾아와도 팔 물건이 없어서다.

지난 7월 영국 런던에 위치한 대형 슈퍼마켓 테스코의 음료수 진열대 곳곳이 비어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7월 영국 런던에 위치한 대형 슈퍼마켓 테스코의 음료수 진열대 곳곳이 비어있다. [AFP=연합뉴스]


당장 먹거리가 위기에 처했다. 지난달 24일 맥도날드는 매장 메뉴에서 병 음료와 밀크셰이크를 당분간 뺀다고 밝혔다. 이유는 ‘공급망 문제’라고 했다. EU국에서 건너와야 할 제품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KFC·난도스는 주재료인 닭고기가 없어 아예 일부 매장의 운영을 중단했다.

슈퍼마켓 진열대에서는 물과 우유 같은 음료 상품이 사라졌다. 액체 종류는 무겁고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반면 이윤은 적어 퇴출 1순위가 됐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과일도 주요 퇴출 대상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다. 운전자들의 연봉 인상이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특히 상품 수요가 높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기점으로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두고 영국 런던 거리가 쇼핑객들로 가득찼다. [AP=연합뉴스]

지난해 12월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두고 영국 런던 거리가 쇼핑객들로 가득찼다. [AP=연합뉴스]

영국 소매 컨소시엄 CEO 헬렌 디킨스는 “지금까지는 혼란이 제한적이었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상황이 더 악화할 수 있다”며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의 폭은 줄어들고, 가격은 인상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 유통전문가들은 “운전자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제공하는 것은 장기적인 해결 방안이 아니다”라며 “정부가 EU 내 트럭운전 노동시장의 접근을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이 직업을 ‘부족직업군’ 목록에 추가해 해외 인력 채용문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다. 부족 직업군으로 지정되면 노동자들의 영국 출입 제한이 완화된다.

반면 일각에서는 트럭운전자 분야의 외국인 노동자 의존도를 낮출 기회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인사 및 인력개발 전문기관인 공인인력개발연구소(CIPD)의 선임 노동시장 전문위원 게르윈 데이비스는 “해외 노동력과 미숙련자에 대한 한계가 드러났다”며 “많은 고용주가 이 직업의 질을 검토할 때”라고 말했다. 콰시 콰르텡 영국 경제부 장관도 “해외 노동인력에 기대지 말아달라”며 사실상 해외 인력의 고용 기회를 넓힐 계획이 없다는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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