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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명 소말리아 향했다, 같은 아픔 겪은 6·25 韓의 PKO [유엔 가입 30주년 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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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유엔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94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 결의 195호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인정받았다. 유엔군의 6ㆍ25 전쟁 파병 근거가 된 건 1950년 6월 27일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83호였다.  

하지만 유엔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쉽게 품지 않는 엄한 부모 같았다. 미국과 옛 소련의 대립구도로 수십년 간 한국의 유엔 가입은 좌절됐고, 냉전이 끝난 뒤인 1991년에야 유엔에 입성했다. 이후 유엔 사무총장 배출, 두 차례의 안보리 비 상임이사국 수임 등 한국은 ‘준비된 회원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중앙일보는 한국의 유엔 가입 30주년을 맞아 한국 ‘유엔 외교’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본다. 

1994년 내전 중인 소말리아로 파견됐던 상록수 부대원들이 김영삼(가운데) 대통령과 기념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상록수부대는 평화유지군으로 1993년 6월부터 약 8개월간 소말리아의 도로 재건 사업 등 국제평화유지활동을 수행했다. [중앙포토]

1994년 내전 중인 소말리아로 파견됐던 상록수 부대원들이 김영삼(가운데) 대통령과 기념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상록수부대는 평화유지군으로 1993년 6월부터 약 8개월간 소말리아의 도로 재건 사업 등 국제평화유지활동을 수행했다. [중앙포토]

“소말리아에 평화를, 조국에 충성을.” 

1993년 6월 29일, 상록수부대는 유엔 국제평화유지활동(PKO·peace keeping operation)을 위해 이같은 부대훈을 가슴에 품고 내전 중인 소말리아로 향했다. 상록수부대는 이날 선발대 60명이 전세기를 타고 파견 길에 올랐고, 한 달 후인 7월 31일 190여명의 후발대가 합류했다. 장교 30명, 부사관 32명 등 총 250명에 달하는 평화유지군이 '소말리아의 평화'를 위해 나섰다.

6·25전쟁 상처 넘어 평화 최전선에

1993년 상록수부대원들이 소말리아에서 평화유지군 활동을 하는 모습. [중앙포토]

1993년 상록수부대원들이 소말리아에서 평화유지군 활동을 하는 모습. [중앙포토]

상록수부대의 소말리아 파견은 1991년 유엔 가입 2년 만이자 한국군 역사상 최초의 PKO 파견이었다. 당시 원형재 육군 공병감(공병 병과 최고 지휘관)은 상록수부대 환송식에서 “이번 파병을 통해 한국군은 사상 최초로 세계 평화 유지활동에 참여하게 됐다”며 “상록수부대원은 국가와 국민을 대표하는 민간 외교관이자 군사 외교관이라는 사명감과 긍지를 가지고 임무를 수행해달라”고 당부했다.

PKO는 유엔에 가입된 국가들이 주요 분쟁 지역이나 재난 지역에 병력을 파견해 평화 유지를 지원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이같은 활동에 나서는 평화유지군은 현지에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민간인 보호와 치안 유지 등 평화적 활동에만 전념한다. 교전 임무를 담당하지 않는 것은 물론, 무력을 활용한 분쟁 종결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2021년 기준 9만여명의 12개 PKO 임무단 중 대부분이 의무·공병부대 등 비전투병과 중심인 이유다. 1993년 소말리아에서 주둔한 상록수부대 역시 ▶도로 개·보수 ▶지역 시설 공사 ▶주요 보급로 보수 공사 등 재건 사업을 주요 임무로 하는 공병대대였다.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주보급로 보수 작전을 진행중인 한빛부대원. [사진 합동참모본부]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주보급로 보수 작전을 진행중인 한빛부대원. [사진 합동참모본부]

평화유지군의 전투병과 비중이 낮은 것은 PKO 활동 자체가 “자위(self defense)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이행 이외에는 무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을 핵심 교전 수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인 보호를 제외한 그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무기를 사용하거나 교전에 나설 수 없단 의미다.

문진혁 국방대 국제평화활동(PKO)센터 전문교수는 “유엔 PKO는 분쟁 당사자의 평화적 합의를 바탕으로 분쟁이 종료되었거나, 종료될 즈음 임무가 시작돼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최우선 목적으로 한다”며 “유엔 PKO 원칙은 ‘정당방위 및 위임명령 수호시에만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무력 사용 제한 원칙은 때로 PKO 임무 수행을 제약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특히 내전이나 분쟁이 아직 종결되지 않은 국가에서 민병대나 게릴라 무장세력 등은 평화유지군이 무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역이용해 보급품 약탈 등을 시도하기도 한다.

2011년 12월부터 2012년 4월까지 UNOCI 대표로 코트디부아르 현지에서 평화유지활동을 총괄한 최영진(가운데) 전 외교부 차관은 평화유지군의 교전 수칙으로 인해 현지 민병대 등에 의한 보급품 수탈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중앙포토]

2011년 12월부터 2012년 4월까지 UNOCI 대표로 코트디부아르 현지에서 평화유지활동을 총괄한 최영진(가운데) 전 외교부 차관은 평화유지군의 교전 수칙으로 인해 현지 민병대 등에 의한 보급품 수탈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중앙포토]

유엔 PKO 담당 사무차장보, 주 코트디부아르 유엔 평화유지임무단(UNOCI) 대표 등을 역임한 최영진 전 외교부 차관은 “2011년 코트디부아르에서 평화유지단을 이끌 당시 현지의 애국청년단 등 민병대가 평화유지군이 수송 중인 품을 탈취하는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상했다.

최 전 차관은 또 “당시 현지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군대는 보급품이 약탈당하는 상황에선 당연히 응사하며 교전했기 때문에 민병대들이 프랑스군은 건드리지 못하고 평화유지군만을 타깃으로 삼는 상황이 계속됐다”며 “무엇보다 힘든 것은 이런 일이 발생했을 경우 유엔본부에서조차 ‘왜 이런 한심한 상황이 발생하도록 놔두고 있었냐’는 식의 비난이 이어졌다는 점이었다”고 말했다.

1994년 3월 소말리아에서의 평화유지활동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상록수부대원들. [중앙포토]

1994년 3월 소말리아에서의 평화유지활동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상록수부대원들. [중앙포토]

평화유지군의 교전 수칙은 상록수부대가 파견 8개월만인 1994년 3월 조기철수를 결정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소말리아는 내전이 격해지고 물리적 충돌이 거세지는 등 상황이 점차 악화했다. 미국·이탈리아 등은 이같은 위험을 감지, 선제적으로 평화유지군을 전원 철수했다. 한국 정부 역시 무력 사용이 제한된 평화유지군이 현지에서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상록수부대는 내전의 총탄 속에 소말리아 국민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한국은 1993년 상록수부대 파견 이후 유엔과 국제사회에서의 입지가 넓어짐에 따라 PKO 파견 규모 역시 점차 키웠다. 2007년 7월엔 레바논 평화유지군인 ‘동명부대’를 파견했고, 2013년 3월엔 남수단 임무단인 ‘한빛부대’를 보내는 등 지금까지 총 7개의 부대가 PKO 활동에 참여했다. 지난 2월 기준 한국은 총 5개의 유엔 PKO 임무단에 총 582명을 파견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올해 PKO 분담금 역시 1억3600만 달러(약 1580억원)로 세계 10대 공여국에 해당하는 규모다.

김효수 국제평화활동센터장은 "PKO 파병을 한 번 보내기 위해선 수없이 많은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짧게는 몇개월, 길게는 몇년까지 걸리는 것을 지켜봤다"며 "그만큼 PKO 파병은 국내외적으로 파급효과가 크고 고려요소도 많다"고 말했다. [사진 국제평화활동센터]

김효수 국제평화활동센터장은 "PKO 파병을 한 번 보내기 위해선 수없이 많은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짧게는 몇개월, 길게는 몇년까지 걸리는 것을 지켜봤다"며 "그만큼 PKO 파병은 국내외적으로 파급효과가 크고 고려요소도 많다"고 말했다. [사진 국제평화활동센터]

김효수 국방대 국제평화활동센터장(대령)은 “PKO 활동은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국가 이미지와 함께 국가 위상을 제고하고 우방국과의 군사동맹체제를 강화한다는 의미를 갖는다”며 “한국전쟁 당시 유엔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 한국은 현재와 같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고, 이제는 우리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차원에서 PKO 활동에 적극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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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 7~8일 서울에서 개최되는 유엔 PKO 장관회의는 한국이 PKO 활동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PKO장관회의는 평화유지 활동 분야에서 이뤄지는 최대 규모, 최고위급 회의체다. 올해 회의엔 유엔 PK특별위원회 155개국 외교·국방장관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 3월 평화유지구상(A4P) 출범 3주년 기조연설을 통해 “유엔의 도움으로 전쟁의 참화에서 평화를 재건한 우리나라가 유엔 평화유지활동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사례”라며 “PKO외교장관 회의를 통해 PKO 개선을 위한 국제사회의 정치적 의지를 결집하고 실질적 공약을 견인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노산 한빛부대장(대령) 인터뷰

2013년 3월 아프리카 남수단에 파견된 평화유지군 한빛부대는 현지에서 ‘남수단의 희망’으로 불린다. 지난 8년간 보급로 개설 등 700여건의 재건지원 작전을 통해 남수단을 죽음의 땅에서 평화와 희망의 땅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현지에서 한빛부대를 이끌고 있는 노산 대령은 과거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당시 현지에 파견된 단비부대 1진 선발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며 PKO 활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하 노 대령과의 일문일답.

한빛부대장으로 PKO 파견에 나선 계기는.

A. 2010년 아이티에 이어 남수단에서 다시 한번 봉사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국제평화에 이바지하는 한빛부대장으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가족들은 오히려 저를 응원해줬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부대 소대장으로 베트남 파병을 다녀온 아버지, 간호장교로 전역한 아내, 그리고 군 복무중인 아들까지 온 가족이 격려와 지원을 해 준 덕분에 다시 한번 남수단에서 헌신과 봉사의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현지 재건 작전에 나선 한빛부대원들의 모습. [사진 합동참모본부]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현지 재건 작전에 나선 한빛부대원들의 모습. [사진 합동참모본부]

현재 남수단에서 한빛부대가 맡은 임무는.

A. 남수단 재건 지원과 인도주의적 활동입니다. 특히 700여건의 재건지원작전 중 주보급로 개설은 남수단에 가장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남수단 내 200여개 부족 간 소통과 물적 교류가 가능해졌고, 이는 물가 안정과 UN의 활동 영역 확대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또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빛직업학교와 한빛농장을 운영하는 등 인도주의적 활동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11년 전인 2010년에도 아이티에서 PKO 활동을 했는데.

A. 당시 아이티는 태풍 피해에 더해 규모 7.0의 강진으로 16만 명의 사망자와 3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재건 의지마저 상실할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현지에 파견된 단비부대 역시 끼니를 떼우는 것은 물론 자체 안전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희망은 피어났습니다. 단비부대는 건물의 잔해를 제거하고 도로를 정비했고, 하천을 준설하며 삶의 기반을 조금씩 복구해 갔습니다. 몸은 힘들고 고됐지만 현지에서 느낀 감사와 고마움, 사랑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2018년 한빛부대원들이 추석을 맞아 현지 주민들을 초청해 한복 및 민속놀이 체험에 나선 모습. [사진 합동참모본부]

2018년 한빛부대원들이 추석을 맞아 현지 주민들을 초청해 한복 및 민속놀이 체험에 나선 모습. [사진 합동참모본부]

두 차례에 걸친 평화유지군 파견으로 그 누구보다 PKO의 의미와 중요성을 체감했을 것 같다.

A. 한빛부대 전 장병은 한명 한명이 군사외교관으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남수단 국민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역량을 베푼다는 측면에서 평화유지활동은 더없이 기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PKO는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고 국민의 가슴에 자부심을 새기는 일일 뿐만 아니라 도움을 도움으로 갚아온 우리나라의 품앗이 전통을 세계 속에 뿌리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 유지를 위한 임무수행 과정에서 느낀 가장 큰 어려움은.

A. 파병을 준비하던 당시 한국은 겨울이었지만 남수단에 도착했을 땐 40도를 웃도는 뜨거운 건기였습니다. 갑작스러운 기온 차이와 현지 더위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항시 착용하는 마스크가 땀에 젖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스크를 교체하는 부대원들을 보며 늘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임무 수행이 곧 남수단 국민의 생존으로 직결된다는 보람과 자긍심으로 우리의 사명과 의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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