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이야기’ 담아 발효시킨 맥주 한 병

중앙일보

입력 2021.09.04 12:00

업데이트 2021.09.06 15:15

투박한 갈색병에 아버지가 편지 쓰듯 써 놓은 ‘개항로 맥주’란 이름. 포스터 모델은 인천 영화관의 간판 그림을 직접 그렸던 나이지긋한 아저씨. 이것만 봐도 이 맥주, 매력 있다. 인천 해안동에 있는 양조장에서 만들고, 맥주병 글씨는 50년 넘게 인천에서 목간판을 만드는 장인이 직접 썼다. 무엇보다 인천에서만 판다. 맛보고 싶다면 수고스럽게 인천을 방문해야 한다. 수제맥주 열풍 속 전국 여느 편의점 냉장고를 꽉 채운 맥주와는 분명 다르다. 그래서 궁금했다. 인천 사람과 이야기가 깊게 숙성해 탄생한 톡 쏘는 라거 맛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양조장을 찾았다.

[민지리뷰]
인천 수제맥주
개항로 맥주

인천의 이야기를 담은 ‘개항로 맥주’. 수제맥주 브루어리인 칼리가리 브루잉이 지난해 '인천맥주'란 이름으로 리브랜딩한 뒤 내놓은 첫 맥주다. [사진 인천맥주]

인천의 이야기를 담은 ‘개항로 맥주’. 수제맥주 브루어리인 칼리가리 브루잉이 지난해 '인천맥주'란 이름으로 리브랜딩한 뒤 내놓은 첫 맥주다. [사진 인천맥주]

어떤 맥주인가요.

개항로 맥주는 인천의 수제 맥주 양조장 ‘칼리가리 브루잉’이 2020년 ‘인천맥주’란 이름으로 다시 브랜딩한 뒤 만든 첫 맥주랍니다. 맥주 종류는 라거로, 도수는 4.5%입니다. 맥주 이름은 개항지인 인천 신포동의 역사를 담았습니다. 지역 스토리를 담았다는 취지에 맞춰 인천에서만 판매해요. 나는 인천 해안동에 위치한 인천맥주 브루어리에서 직접 구매했습니다만, 꼭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인천의 펍이나 치킨집 등 인천에 있는 가게에서도 맛볼 수 있어요. 최근 SNS에 이 맥주에 대한 피드를 많이 볼 수 있어요.

양조장에 직접 가서 살 정도로 애정이 깊은가 봐요.

요즘 많은 사람이 그렇듯 저 역시 레트로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다른 내용 없이 ‘개항로’ 세 글자가 적힌 간결한 디자인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순전히 이 디자인 때문에 개항로 맥주에 꽂혔어요. 그렇게 첫 병을 따게 됐고 이후 인천맥주와 인천 도시재생 프로젝트팀 '개항로 프로젝트'가 협업했다는 점, 인천에서 영화 간판을 그리시던 분을 모델로 기용했다는 것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알면 알수록 더 관심이 가더라고요.

맥주병의 '개항로'란 글씨는 50년 넘게 인천에서 목간판을 만든 전종원 대표가 썼다. 사진 왼쪽의 포스터 속 모델은 인천에서 영화 간판을 직접 그렸던 최명선 대표다. [사진 인천맥주 SNS]

맥주병의 '개항로'란 글씨는 50년 넘게 인천에서 목간판을 만든 전종원 대표가 썼다. 사진 왼쪽의 포스터 속 모델은 인천에서 영화 간판을 직접 그렸던 최명선 대표다. [사진 인천맥주 SNS]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네요.

인천으로 시작해 인천으로 끝나는 개항로 맥주만의 스토리가 있어요. 인천 사람과 오래된 가게의 이야기를 담아 원도심을 새로운 명소로 만들어가고 있는 이창길 개항로 프로젝트 대장과 인천맥주를 이끄는 박지훈 대표가 함께 기획했어요. 또 50년 넘게 인천에서 목간판 작업을 하는 전종원 대표(전원공예사)가 글씨를, 인천에서 영화 간판을 그렸던 최명선 대표가 포스터 모델이 돼 만든 로컬 브랜드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브랜딩이 있을까 싶어요. 나도 그랬고 많은 사람이 이 맥주를 마시며 인천이라는 지역을 다시 보게 됐으면 해요. 실제로 지난 4월에는 이 네 명이 인천시로부터 ‘관광 진흥 유공 표창장’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다른 지역 술과 다른 특별함은 뭔가요.

여행을 가면 지역에서만 마실 수 있는 술을 찾은 경험이 있으시죠? 부산에 가면 C1 소주, 제주에 가면 한라산이나 올레를 마시고 싶어지잖아요. 개항로 맥주는 지금까지 제가 봤던 어떤 술보다 지역성이 강했어요. 또 디자인의 차별성도 한몫해요. 무엇보다 국내 최초의 비건 인증을 받은 맥주란 점이 더 특별합니다.

인천 해안동에 있는 인천맥주 양조장의 입구. 인천이 항구도시란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파란 벽돌 외관이 인상적이다. [사진 인천맥주]

인천 해안동에 있는 인천맥주 양조장의 입구. 인천이 항구도시란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파란 벽돌 외관이 인상적이다. [사진 인천맥주]

인천맥주 양조장 내부. 외국 여행에서나 볼 법한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여행으로 찾아도 손색없다. [사진 인천맥주]

인천맥주 양조장 내부. 외국 여행에서나 볼 법한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여행으로 찾아도 손색없다. [사진 인천맥주]

줄지어 서있는 대형 발효조 사이 통로. 압도감이 느껴진다. [사진 인천맥주]

줄지어 서있는 대형 발효조 사이 통로. 압도감이 느껴진다. [사진 인천맥주]

차에도 인천 맥주 로고를 입혀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사진 이현우]

차에도 인천 맥주 로고를 입혀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사진 이현우]

맥주는 당연히 ‘비건’ 아닌가요.

나 역시 ‘맥주는 보리로 만드는데 다 비건 아니야?’라고 생각했어요. 양조를 하다 보면 홉이나 효모 등에서 각종 부산물이 생긴다고 해요. 맥주를 병에 담을 때 이 부산물이 들어가면 맥주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걸 막기 위한 청징제를 첨가해요. 그런데 이 대부분의 청징제는 달걀이나 생선에서 얻은 동물성 성분으로 된 게 많아요. 비건 맥주는 이런 청징제를 비롯해 여과제 등 다른 첨가물도 식물 성분만을 사용한 맥주입니다. 개항로 맥주는 해초로 만든 청징제를 사용했어요. 미국 비건인증기관인 ‘BEVEG’에서 인증 마크도 받았고요. 사실 청징제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번에 브루어리에서 박 대표에게 직접 설명을 듣다보니 알게 됐어요. 이렇게 맥주 하나로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매력적이지 않나요.

개항로 맥주는 목 넘김이 좋은 라거를 지향하고 있다. [사진 인천맥주]

개항로 맥주는 목 넘김이 좋은 라거를 지향하고 있다. [사진 인천맥주]

이 대목에서 맛이 정말 궁금하네요.

와인 바를 운영하고 있지만 맥주 맛을 잘 알지는 못해요. 남들보다 약간 호기심이 더 있는 정도랄까요. 그래도 마셔보면 ‘오 이거 괜찮은데’ 정도의 느낌은 알아요. 개항로 맥주는 마셔보니 ‘라거인데 부드럽네’란 생각에 고개가 갸우뚱하더라고요. 직접 양조한 박 대표에게 이 물어보니 ‘목넘김이 좋은 맥주를 만드려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또 끝맛으로 은은한 허브향이 감돌아 기존 라거와는 다른 고급진 느낌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가격이 비싸진 않나요.

매장 판매가로 5000원(500㎖)으로, 다른 맥주에 비해 1000원가량 더 비싸죠. 하지만 크래프트 비어(수제맥주)인 개항로 맥주가 가지고 있는 품질을 생각했을 때는 적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다른 크래프트 비어의 매장 판매가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저렴한 편이 아닐까 싶어요. 국내 맥주에 익숙한 동네 어르신도 편하게 접할 수 있게 가격대를 맞췄다고 합니다. 이름도 수제맥주임을 내세우기보다 ‘인천맥주’란 친근한 이름으로 정한 것도 같은 이유이고요. 인천여행을 왔다 구매하는 사람이 많아서 선물세트도 구성해 두었더라고요. 맥주 2병과 유리잔 굿즈 2개, 레트로한 감성이 담긴 엽서와 스티커로 구성돼 있어요.

양조장 로비에는 개항로 맥주와 굿즈를 판매하고 있다. 레트로한 감성이 듬뿍 담긴 제품이고, 이곳에서만 살 수 있어 손이 절로 간다. [사진 이현우]

양조장 로비에는 개항로 맥주와 굿즈를 판매하고 있다. 레트로한 감성이 듬뿍 담긴 제품이고, 이곳에서만 살 수 있어 손이 절로 간다. [사진 이현우]

맥주 2병, 맥주잔 2개로 구성한 선물세트와 다양한 굿즈들. 포스터 속 최 대표님의 모습이 정겹다. [사진 이현우]

맥주 2병, 맥주잔 2개로 구성한 선물세트와 다양한 굿즈들. 포스터 속 최 대표님의 모습이 정겹다. [사진 이현우]

브루어리 방문은 어땠어요. 누구나 갈 수 있나요.

술을 마시면서 그 술을 양조한 양조장에 직접 방문해 술을 사는 것이 술을 가장 잘 소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개항로 맥주의 경우 이런 감성적인 부분을 넘어 양조장 자체가 매력적입니다. 양조장하면 프랑스의 유명 와이너라니 독일의 수제 맥주 공장 같은 곳을 떠올리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경험하지 못할 거란 선입견도 있고요. 이곳은 ‘와’란 감탄사가 절로 나와요. 인천 한복판에 이런 공간이 멋진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어요. 안타깝게도 코로나 19 때문에 현재는 방문 투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9월 말쯤 투어 프로그램과 아카데미를 진행할 예정이라고는 합니다. 부디 코로나 19가 잠잠해지길 기대해보는 수밖에요.

그런데 왜 인천에서만 파나요.

서울에서 매번 개항로 맥주를 마시러 가기엔 다소 먼 거리예요. 당장 개항로 맥주가 생각나더라도 집 앞에서 사 마실 수는 없다는 건 제 입장에서 아쉬운 점이겠죠. 리뷰를 보고서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인천으로 가야 하고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인천 맥주는 인천에 있을 때 가장 빛나지 않을까 싶어요. 지역의 이야기를 담아 발효시켰다는 점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잖아요. 사실 다른 지역에서도 판매 문의가 많이 오는데, 아직은 인천 지역 내에서만 판매·유통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맥주병에서 비건 맥주를 인증하는 ‘BEVEG’ 로고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이현우]

맥주병에서 비건 맥주를 인증하는 ‘BEVEG’ 로고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이현우]

자신의 라이프스타일과 닮은 점이 있다면요.

아직 비건은 아니지만, 그런 가치를 지향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항로 맥주가 반가워요. 솔직히 마시면서 직접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겠어요. 우리가 맥주 한 모금을 마셔보고 ‘음, 역시 첨가물이 식물성이라 아주 깔끔하군’이라고 하진 않잖아요. 하지만 맥주에 들어가는 이름 모를 첨가물마저도 신경을 써 만든 이들의 세심함, 작은 부분일지라도 생각하고 실천하는 모습이 나처럼 생각만 하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 그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길 스스로 바라봅니다.

누구에게 추천하세요.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 누구나요. 맥주는 역시 라거라는 식상한 추천은 아니에요. 요즘 맥주뿐 아니라 정말 다양한 술들을 볼 수 있어요. 와인은 유행처럼 번진지 오래됐고, 최근엔 전통주 바람도 거세죠. 각자의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되지만 라거가 생각난다면 오늘 저녁엔 인천에서 개항로 맥주를 한 번 마셔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 그리고 개항로 맥주는 인천의 여러 맥주 중 하나에요. 개항로 맥주 외에 에일류로 바나나향이 첨가된 ‘바나나 화이트’, 쌉싸름한 맛이 매력인 ‘사브작 IPA’ 등 다양한 맥주가 있으니 취향껏 맛보길 권합니다.

민지리뷰는...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소비로 표현되는 시대. 소비 주체로 부상한 MZ세대 기획자·마케터·작가 등이 '민지크루'가 되어 직접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공간·서비스 등을 리뷰합니다.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