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대, 사회에 나선 갓 스물 청춘들에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정재은 감독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1)에선 서로 처지가 달라진 여고 시절 친구들의 삶에 길 잃은 아기 고양이 ‘티티’가 파고들며 작은 파란을 일으키죠. 그 가운데 태희가 있습니다. 뇌성마비 시인을 위해 타이핑을 해주는 태희는 배를 타는 노동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아무런 미련 없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좋은 거 아닐까?” 볼에 여드름이 빼죽 솟은 빨간 장갑의 태희. 영화 세계의 자유로운 탐험가 배우 배두나(42)의 출발점이었죠.
지난 1일 폐막한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에서는 올해 개봉 20주년을 맞은 ‘고양이를 부탁해’가 디지털 복원돼 상영회를 가졌습니다. 정 감독과 주연 배두나‧이요원‧옥지영이 20년 만에 다시 뭉친 씨네토크 행사는 20초 만에 매진됐죠. “아직도 ‘고양이를 부탁해’ 태희처럼 살고 있다”는 배두나의 또 다른 출연작 7편을 상영하는 특별전도 따로 진행됐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실종된 개를 찾아 나선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 현남부터 첫 천만 영화 ‘괴물’의 양궁선수 남주, 박찬욱 감독의 블랙코미디 잔혹극 ‘복수는 나의 것’의 재벌 해체운동가 영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공기인형’의 인형 노조미, 남북한 올림픽 단일팀을 그린 ‘코리아’의 북한 탁구선수 리분희…. 새삼 태희를 마주하며 “나는 잘 살아왔나” 자문했다는 그의 지난 행보가 매 작품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새겨져 있었죠.
이번 특별전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백인‧멕시코인‧복제인간 1인 3역을 연기한 할리우드 진출작 ‘클라우드 아틀라스’, 좀비사극 ‘킹덤’의 의녀 서비, 검경 수사극 ‘비밀의 숲’ 한여진 경감 등 그의 출연작들은 국적 불문 판타지든 사회파 드라마든 배두나 외엔 다른 배우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공통점입니다. 1999년 드라마 ‘학교’, 영화 ‘링’으로 연기 데뷔해 22년간 40편 넘는 영화‧드라마에 출연한 다작 배우이기도 합니다.
이번 배두나 특별전을 준비한 김현민 SIWFF 프로그래머는 그를 두고 “성실한 모험가”라 부르더군요. 올 하반기 넷플릭스 출시가 예상되는 SF 드라마 ‘고요의 바다’에서 배두나는 달 탐사에도 나섭니다.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등이 개봉 당시 대중에게 외면받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들은 왜 흥행이 안 되는지 고민하기도 했다는 배두나. 그럼에도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현재를 사는 게 저의 원동력”이라고 다부지게 말합니다. “무심하다는 것. 그것은 저 자신을 전진하게끔 하는 힘”이라는 그의 소우주를 팟캐스트 ‘배우 언니’가 김현민 프로그래머와 함께 돌아봤습니다.
배우 언니 ‘20주년 '고양이를 부탁해' 배두나 유니버스’는 중앙일보 J팟(https://www.joongang.co.kr/jpod/episode/662)에서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