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경 보험사기

진료만 받아도 매일 30만원 벌었다…전직 보험설계사 기막힌 수법

중앙일보

입력 2021.09.04 08:00

업데이트 2021.09.04 11:39

[요지경 보험사기]

대전시에 사는 전직 보험설계사 김모(54)씨는 지난 10년간 그야말로 환자가 직업이었다. 관절염 등의 치료 명목으로 매일 5~30분 간격으로 빼곡하게 진료 예약을 해 병원 5~6곳을 다녔다. 병원에 가 진료를 보는 것만으로 김씨는 매일 25만~30만원을 벌었다. 10년 동안 6717차례 병원을 찾은 김씨가 챙긴 보험금은 3억3585만원에 달했다.

전직 보험설계사 등 10명은 10년 간 3만5832회 통원치료를 받으며 보험금 16억5000만원을 받아챙겼다.

전직 보험설계사 등 10명은 10년 간 3만5832회 통원치료를 받으며 보험금 16억5000만원을 받아챙겼다.

김씨의 지인인 박모(63)씨도 같은 기간 5133회 병원을 찾아 보험금 2억1493만원을 받았다. 이렇게 김씨와 그의 지인 10명이 2006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받은 통원치료는 3만5832회였고, 지급된 보험금은 16억5000만원이다. 대부분 보험설계사인 이들의 ‘병원 쇼핑’은 올해 8월 대법원에서 보험사기로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았다.

김씨 등은 2006년 자신이 일하던 A보험사가 판매한 종신보험에 든 뒤 통원 치료 1회당 4만~5만원씩 받는 특약 상품에 가입했다. 하루 통원 치료 횟수와 상관없이 보험금이 지급되는 상품이었다. 이들의 '병원 쇼핑'이 본격 시작된 건 보험사를 그만둔 2007년부터다. 주로 무릎관절증과 평발, 무지외반증 등의 질환으로 진료를 받았다. 병원과 한의원 모두 진료가 가능한 질환이다.

김씨 등은 범행 초기에는 2~3일에 1번 정도 병원을 찾았다. 보험 사기가 들통나지 않자 좀 더 대담해졌다. 통원 횟수를 점차 늘려간 것이다. 매일 내과와 정형외과, 신경외과, 재활의학과, 요양병원 등 5~6곳의 병원을 돌며 진료를 받았다. 1년에 병원에서 받은 진료만 700회가량이다.

2심 재판부가 “이렇게까지 치료를 받을 것이라면 차라리 종합병원에 입원해 집중적인 치료를 받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보일 정도”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김씨 일당의 보험사기는 무릎관절염 등으로 통원치료를 받던 김씨가 에어로빅과 실내 자전거운동이 결합된 스피닝 등 강도높은 운동을 하는 것 등을 확인한 보험사기특별조사팀에 덜미가 잡혔다. 셔터스톡

김씨 일당의 보험사기는 무릎관절염 등으로 통원치료를 받던 김씨가 에어로빅과 실내 자전거운동이 결합된 스피닝 등 강도높은 운동을 하는 것 등을 확인한 보험사기특별조사팀에 덜미가 잡혔다. 셔터스톡

이들은 오전에 각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점심에 모여 함께 식사한 뒤 병원의 오후 진료가 시작되면 근처 병원을 돌았다. 병원 여러 군데를 들리다 보니, 5~20분 간격으로 병원 예약이 빼곡하게 잡히기도 했다. 물리치료 등 치료를 받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병원을 찾아서 처방전을 받고도 약을 타가지 않거나, 물리치료 처방을 받아도 물리치료를 받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의사를 보지 않고 간호사에게 “나 왔어”라며 눈도장만 찍고 나오는 경우도 잦았다. 치료는 받지 않았지만, 보험금 청구를 위해 병원에서 수납은 빼먹지 않았다. 상급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권한 병원은 다시 찾지 않았다.

10년간 이어지던 이들의 범행은 A보험사의 보험사기 특별조사팀(SIU)에 덜미가 잡혔다. SIU는 빅데이터를 통해 이들이 보험금을 청구한 질환의 평균 진료일수와 김씨 등의 진료일수를 비교해 보험사기를 의심했다.

하지만 보험사기 입증은 쉽지 않았다. 입원치료는 외출 내역 등을 토대로 허위 입원 여부를 알 수 있지만, 통원 치료는 병원에 가 진료만 받는다면 사기 여부를 판단하기 쉽지 않아서다. SIU는 대전 지역에서 6개월간 밀착조사를 벌여 이들의 사기 행각에서 빈틈을 찾아냈다.

먼저 덜미가 잡힌 건 무릎관절염 등으로 다리가 아프다며 수년째 통원치료를 한 김씨다. 김씨는 오전에 헬스장에서 실내자전거 운동인 스피닝 등 격렬한 운동을 한 뒤 오후에는 병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치료를 했다. 김씨가 스피닝을 마친 후 찾은 정형외과에 머무른 시간이 10분도 채 안 되는 점 등도 확인했다.

이밖에 김씨 등 일당이 병원에서 진료 없이 빠져나오거나, 부부 중 한 명만 진료하고 부부가 모두 보험금을 청구한 사실 등이 확인됐다. SIU의 수사 의뢰로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2016년 7월 이들 10명을 포함해 1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김씨 외에도 김모(68)씨 6103회, 허모(66)씨 3982회, 김모(64)씨 4147회 등의 순으로 통원횟수가 많았다.

보험사기 적발금액 및 인원.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보험사기 적발금액 및 인원.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김씨 등은 올해 8월 대법원에서 유죄를 최종 확정받았다. 통원 치료가 가장 많았던 김씨는 징역 1년 6개월을, 나머지 4명은 각각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통원 치료를 2000여번가량 받은 5명은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경찰이 적발한 나머지 4명은 1심 재판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들의 범행으로 인한 피해는 땀 흘려 얻은 소득의 일부를 보험료로 납부한 선량한 다수의 보험가입자에게 고스란히 돌아가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허위·과다 입원으로 지급받은 보험금 전체에 사기죄가 적용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었지만, 허위·과다 통원에 대해서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것은 처음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김씨 등의 범행을 도운 의사와 한의사 6명도 사기방조 등의 혐의로 입건돼 수사를 받았다. 이중 허위 진단서를 끊어준 정형외과 의사만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고, 나머지 5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생명보험협회 관계자는 “특정 질병으로 하루에 수차례 통원치료를 하는 경우 환자가 직접 병원에 고지하지 않으면 의료기관에서는 해당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다”며 “의료쇼핑 환자의 과거 입·통원치료 이력을 병·의원이 확인할 수 있도록 제도적 개선방안을 마련할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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