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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뺨 맞고 오른뺨 내민다? 이걸 안하면 빰만 두배로 아프다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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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2000년 전 예수는 실제로 이렇게 기도했다. 갈릴리의 들과 산, 예루살렘의 시장통, 올리브 산의 방앗간에서 예수는 무릎을 꿇었을 터이다. 두 손을 모은 채 이렇게 읊조렸을 터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속성이 땅에 있는 저희의 속성이 되게끔 해주소서.”

이것이 바로 예수의 기도였다.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일.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였다.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에 세워져 있는 작은 교회에 있는 십자가 상. 예수는 2000년 전 이곳에서 실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처형장을 향해 길을 걸어갔다.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에 세워져 있는 작은 교회에 있는 십자가 상. 예수는 2000년 전 이곳에서 실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처형장을 향해 길을 걸어갔다.

(16) 왼뺨 맞고서 오른뺨 내밀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예수는 실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법’까지 일러주었다. 하늘이 땅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사람들에게 제시했다. 그중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여라”(누가복음 6장 27절)이다.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갸우뚱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하늘에서 이룬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그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리고 이렇게 추측한다. ‘아! 맞아.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싸울 일이 없겠지.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살겠지. 그러니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셨겠지. 원수를 사랑하라고. 그래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물음표가 하나 있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왜 싸우지 않을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간단하다. 나에게 좋으면 선이고, 나에게 싫으면 악이다. 내게 잘하는 사람은 선인이고, 내게 못 하는 사람은 악인이다. 우리가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항상 ‘나’이다. ‘나의 이익’, ‘나의 철학’, ‘나의 잣대’가 기준이다. 그 기준을 바탕으로 이쪽은 선, 저쪽은 악으로 나뉜다.

예루살렘 맞은 편에 있는 올리브 동산에서 예수는 땀을 피같이 흘리며 땅에 엎드려 기도했다.

예루살렘 맞은 편에 있는 올리브 동산에서 예수는 땀을 피같이 흘리며 땅에 엎드려 기도했다.

아담과 이브도 그랬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 에덴동산에는 선악이 없었다. 아담과 이브는 선도 몰랐고 악도 몰랐다. 에덴동산은 그런 곳이었다. 선과 악으로 쪼개지지 않은 ‘온전한 곳’이었고, 그래서 낙원이었다. 선악을 나누지 않으면 싸울 일도 없다. 그러니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는 부부싸움도 하지 않았을 터이다. 선악과를 따 먹은 뒤에야 비로소 인류 최초의 부부 싸움도 벌어졌으리라.

한마디로 ‘선 긋기’다. 내 마음의 선 긋기. 그로 인해 이쪽과 저쪽, 좋고 나쁨, 선과 악이 생겨난다. 그렇게 그은 선이 수십 개, 수백 개가 뭉쳐서 생겨난 결과물이 있다. 철학적인 용어로는 ‘에고’라고 부른다. 그렇게 그어놓은 숱한 선들이 뭉친 것이 에고다. 그 선들이 에고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선을 지우려면 말이다. 그 선을 지워서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말이다. 그렇게 돌아가야 우리가 에덴동산을 만날 테니까.

원수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은 마음의 선에 의해 원수가 생겨난다. 그 선의 이쪽은 아군, 저쪽은 적군이 된다. 나를 살리려 하면 아군이고, 나를 죽이려 하면 적군이다. 그중에서는 그냥 원수가 아니라 철천지원수도 있다. 우리는 아군보다 적군을 더 자주 생각한다. 그렇게 떠올릴 때마다 선을 긋고, 그 위에 또 선을 긋고, 그 위에 또 긋는다. 선은 갈수록 굵어지고 또 깊어진다. 그래서 원수는 철천지원수가 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 야트막한 계단으로 이어진 오르막 길이라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에게는 무척 힘겨운 길이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 야트막한 계단으로 이어진 오르막 길이라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에게는 무척 힘겨운 길이었다.

그럼 예수는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을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귀를 쫑긋 세운 채 예수에게 주목했을 사람들에게, 저마다 가슴에 선을 긋고 마음에 원수를 품었을 사람들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누가복음 6장 28절)

누가 선뜻 그럴 수 있을까.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잘해주고,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을 하라니 말이다.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키지도 않을 일이다. 저주에 저주를 거듭해도 시원찮은데 축복을 하라니……. 나를 학대하는 이를 위해 기도를 하라니. 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그런데 예수는 한술 더 떴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누가복음 6장 29~30절)

예루살렘 성 옆에 있는 유대인들의 묘지다. 묘지 바로 옆에서 올리브 나무가 자라고 있다.

예루살렘 성 옆에 있는 유대인들의 묘지다. 묘지 바로 옆에서 올리브 나무가 자라고 있다.

듣고만 있어도 분통이 터진다. 뺨 맞은 것도 억울한데, 다른 쪽 뺨을 내밀라니. 겉옷을 빼앗겼는데 속옷까지 내주라니.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도 알 수 없고 설득력도 없다. 그저 좋은 말만 늘어놓는 성인의 ‘공자 왈 맹자 왈’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누가복음 6장 35절)

이 말을 듣는 순간 감정의 파도가 가라앉는다. 그리고 물음이 올라온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그리스어로 ‘hupsistos(훕시스토스)’다. ‘가장 높은 존재’라는 뜻이다. ‘huios(후이오스)’는 ‘아들(son)’이라는 말이다. 그리스어로 ‘huioihupsistou(sons of Most High)’는 ‘가장 높은 존재의 자식들’이다. 예수는 그렇게 표현했다.

왼쪽 뺨을 맞고서 반대쪽 뺨을 다시 내미는 일과 가장 높은 분의 자식이 되는 것. 둘 사이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까. 이 구절을 단순히 ‘예수의 포상’으로만 읽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식이 되는 포상을 바라면서 그렇게 행하는 이들도 있다.

올리브 산에서 바라보면 예루살렘 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예루살렘 성 건너편에는 골고다 언덕이 있다.

올리브 산에서 바라보면 예루살렘 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예루살렘 성 건너편에는 골고다 언덕이 있다.

그런데 예수는 이렇게 강조했다. “그(원수)에게 잘해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라.”(누가복음 6장 35절) 예수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에 밑줄을 긋고 방점을 찍었다. 원수에게 건넬 때도 그렇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때도 그렇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행해야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랄 때 마음에 또 하나의 선을 긋기 때문이다. 그 선들이 뭉쳐서 나의 에고가 된다.

예수는 오른쪽 뺨을 내밀고 속옷까지 건넬 때 왜 그분의 자식이 되는지도 말했다.

“그분(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누가복음 6장 35~36절)

예수의 설명은 명쾌하다. 그는 하느님의 속성을 한마디로 풀어낸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왜 그럴까. 선을 긋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를 아는 자와 은혜를 모르는 자, 그사이에 그은 선이 없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가 다석 유영모는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 했다. 만약 그어놓은 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없이 계신 하느님이 될 수 없다. 없이 계시기에 ‘전지(全知)’이고, 없이 계시기에 ‘전능(全能)’이다.

그게 예수가 말한 ‘신의 속성’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비롭다. 그어놓은 선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올리브 산에 있는 유대인들의 묘지. 수천 년 전부터 유대인은 이곳에 조상의 뼈를 묻었다.

올리브 산에 있는 유대인들의 묘지. 수천 년 전부터 유대인은 이곳에 조상의 뼈를 묻었다.

예수는 거듭 강조한다. 하느님의 속성이 이러하니 너희도 그 속성을 닮으라고 했다. 그럴 때 ‘후이오이훕시스토우(huioihupsistou, 가장 높은 분의 자식들)’가 된다고 했다. 그게 우리가 받을 큰 상이다. ‘huioi(단수는 huios)’에는 ‘후예, 후손’이라는 뜻도 있다. 신의 속성‘에 대한 후예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했다. ‘신의 속성’을 물려받는 일이다.

그러니 오른뺨을 맞고서 왼뺨을 내미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겉옷에 이어 속옷까지 내주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이를 통해 내 마음에 그어놓은 ‘잣대의 선’을 지우는 게 목적이다. 왼뺨을 수십 번, 수백 번 다시 내밀어도 내 마음의 선이 지워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죄 없는 뺨만 아플 뿐이다.

원수를 수천 번 사랑한다 해도 내 마음의 선이 무너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원수는 여전히 원수일 뿐이다. 내 마음에 그은 선이 하나둘 지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없이 계신 하느님’을 닮게 된다.

사람들은 묻는다. “쉽고 간단한 방법을 알려달라. 우리가 어찌해야 ‘신의 속성’을 닮을 수 있나.” 예수도 그런 질문을 숱하게 받지 않았을까. 그래서 늘 생활에서 쉽게 보이는 것들에 비유해 설교를 했다. 예수는 이 모든 이치와 원리를 간추리고 간추려서 유대인들에게 ‘실전용 핵심 총정리판’도 내놓았다. 딱 한 마디로 설명했다.

팔레스타인 지구에 있는 아이가 나귀를 타고서 염소떼를 끌고 가고 있다. 2000년 예수도 저런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지구에 있는 아이가 나귀를 타고서 염소떼를 끌고 가고 있다. 2000년 예수도 저런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누가복음 6장 31절)

거기에는 ‘선 긋기’가 없다. 지구상의 모든 싸움은 선 긋기에서 비롯된다. 인류 최초의 부부 싸움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내 마음에 선 긋기’를 시작하면서 부부 싸움이 비롯됐을 것이다.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부족 개념이 생기고, 국가 개념이 생기고, 민족 개념이 생기고, 인종 개념이 생길 때마다 선이 그어졌다. 그와 함께 싸움이 일어났다. 부부 싸움이든 국가 간 전쟁이든 원리는 똑같다. 전쟁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이치도 똑같다.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 마음에 선을 그을 건가 아니면 지울 건가.”

〈17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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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는 ‘기독교 도인’으로 불리었던 인물입니다.
함석헌과 김흥호 목사 등이 다석의 제자였습니다.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일일식(一日一食)’을 평생 생활화하며
세속에서 수도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만큼 통찰의 눈도 뛰어났습니다.
서구 사회에서 만든 기독교 교리와 관습,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길어올린 영성의 소리를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다석의 글과 설교에는 번뜩이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날 것의 영성’이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세속에서 수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세속에서 수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다석이 하느님을 언급하며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없으면 없는 거고, 있으면 있는 건데
왜 다석은 “없이 계신”이라고 했을까요.

저는 그게 ‘내 마음의 선 긋기’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나와 상대를 가를 때 우리는 마음에 선을 긋습니다.
그 선들을 성냥개비 쌓듯이 하나 둘 쌓다보면
어느덧 나의 에고가 됩니다.

그러니 내가 그어놓은 선이 있으면
에고가 있고,
그어 놓은 선이 없으면
에고도 사라집니다.

하느님은 왜 ‘없이 계신’ 하느님일까요.
하느님의 속성에는 어떠한 선 긋기도 없기 때문입니다.

선 긋기가 없어질 때,
비로소 신의 속성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없이, 계신 하느님이 됩니다.

다석 선생의 이 한 마디만으로도
우리는 깊은 묵상에 잠길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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