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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출신 스튜어트, 옌칭대 중국화·국제화 힘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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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2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92〉

미국대사 스튜어트는 저우언라이(왼쪽)와 접촉이 빈번했다. 1946년, 난징의 미국대사관. [사진 김명호]

미국대사 스튜어트는 저우언라이(왼쪽)와 접촉이 빈번했다. 1946년, 난징의 미국대사관. [사진 김명호]

서구의 기독교 단체가 중국에 세운 교회학교는 기독교와 서구문화 전파가 최종 목표였다. 미국 선교사 스튜어트가 베이징 교외에 설립한 옌칭대학(燕京大學)은 달랐다. 종교학 수강과 예배 참석을 강요하지 않았다. 남녀공학은 물론, 사상과 학문의 자유도 보장했다. 경제학과 학생들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끼고 다녔다. 중국사회과학원 원사(院士) 호우런즈(侯仁之·후인지)가 이런 회고를 남겼다. “옌칭대학은 진정한 의미의 대학이었다. 학생들을 시험하지 않았다. 진리를 전수하고 왜곡된 진리는 배척했다. 신앙도 개인 의사를 존중했다. 스튜어트가 부교장으로 영입한 타임스지 설립자 헨리 루스는 미국에서 대학 홍보에 한몫을 거들었다.”

타임스 설립자, 옌칭대 부교장 맡아

1949년 2월 3일, 중공 야전군의 베이징 입성을 환영하는 옌칭대 학생들. [사진 김명호]

1949년 2월 3일, 중공 야전군의 베이징 입성을 환영하는 옌칭대 학생들. [사진 김명호]

스튜어트는 대학의 중국화를 시도했다. 저명한 중국학자 초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우도 외국인 교수와 차별을 두지 않았다. 수년 만에 중국인 교수가 70%에 육박했다. 종교단체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금도 적극적으로 했다. 미국을 수없이 넘나들었다. 개인 명의로 받은 지원은 거의 구걸에 가까웠다.

대학의 국제화에도 머리를 짜냈다. 저렴한 알루미늄 개발로 거부를 축적한 찰스 홀의 유촉에 주목했다. “자손 망치기 좋은 것이 유산이다. 극히 일부만 가족들에게 분배하고 나머지는 3등분 해라. 알루미늄 연구와 인연이 많았던 오버린대학과 남부 각주의 중학교에 3분의 1씩 기부하고 다른 3분의 1은 미국인이 아시아와 발칸지역에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에 지원해라. 집행은 친구 같은 제자 데이비스와 존슨에게 위임한다.” 신청기관이 줄을 이었다. 데이비스와 존슨을 만나기 위해 줄 대기에 분주했다. 스튜어트에겐 이런 행운이 없었다. 데이비스는 부교장 헨리 루스의 절친한 친구였다. 뉴욕으로 달려간 스튜어트는 헨리 루스와 함께 데이비스와 존슨을 설득했다. 바랐던 금액의 3배를 지원받았다. 스튜어트는 이 돈으로 하버드대학에 동아시아 관련 연구기관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두 명의 집행인도 동의했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하버드 옌칭학사’를 출범시켰다. 하버드와 연계를 도모하던 베이징대학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스튜어트가 갈망하던 옌칭대학의 국제화에 속도가 붙었다. 록펠러재단이 베이징에 설립한 협화의학원 예과를 옌칭대에 합병시켰다. 록펠러 주니어는 매년 옌칭대 예산의 21%를 부담했다.

1929년, 중국 정부가 교육주권을 선언했다. 외국인이 설립한 교육기관의 교장은 중국인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스튜어트는 10년간 재임하던 교장직을 중국인에게 내줬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8년간은 교무장으로 재직했다. 사람들은 중국인 교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튜어트를 여전히 교장이라고 불렀다. 중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마셜은 중국 체류기간 중 비서 겸 요리사로 채용한 중국 청년을 총애했다. 1947년 난징. [사진 김명호]

마셜은 중국 체류기간 중 비서 겸 요리사로 채용한 중국 청년을 총애했다. 1947년 난징. [사진 김명호]

옌칭대학은 중국 신문화운동의 격동기에 태어났다. 정부의 굴욕외교를 질타하고, 민주와 과학을 선망하는 학생시위가 대륙을 수놓던 시절이었다. 스튜어트는 학생들을 지지했다. “중국의 학생운동은 전 세계 민주운동의 일환이다. 학생은 중국의 희망이다. 역사의 전환점에 학생들이 조용한 나라는 미래가 없다. 옌칭대 학생들은 지금이 어떤 시점인지 고민하기 바란다.” 중국 학생들의 애국운동도 구경만 하지 않았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동북(東北)을 침략했다. 정부는 무저항정책을 천명했다. 홍군 소탕에만 힘을 쏟았다. 안내양외(安內攘外), 공산당을 일소해 내부를 안정시킨 후 외부의 침략자를 구축하겠다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호소에 전국의 학생들이 발끈했다. 일본과의 전쟁을 간청하는 청원단(請願團)을 조직해 수도 난징(南京)으로 몰려갔다. 옌칭대학도 들썩거렸다.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청원단에 합세했다. 교무장 스튜어트는 미국에서 귀국 중이었다. 도착 후 첫 질문이 옌칭대 학생들의 청원단 참가 여부였다. 대답을 듣자 안도했다. “우리 학생들이 청원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그간 내 교육방법은 완전 실패다.” 학생들 시위에도 동참했다. 선두에서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외쳐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각인시켰다. 유랑민이 된 동북 학생들에겐 옌칭대학 입학도 허락했다.

1937년 중·일 전쟁 초기, 일본군이 베이핑에 입성했다.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은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으로 이전, 톈진(天津)의 난카이(南開)대학과 연합해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이라는 학술제국을 선보였다.

일본군, 협력 거부한 스튜어트 구금

1921년 봄, 옌칭대 학생들의 야유회. [사진 김명호]

1921년 봄, 옌칭대 학생들의 야유회. [사진 김명호]

옌칭대학은 미국인이 세운 학교였다. 교문에 성조기 게양하고 일본군의 출입을 엄금했다. 치외법권 지역이던 아름다운 교정이 북방 항일운동의 보루로 변했다. 일본군은 협력을 거부하는 스튜어트를 구금했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패망하는 날까지 3년 8개월간 감옥에서 풀어주지 않았다. 수감 생활 중 스튜어트는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졸업생의 회고를 소개한다. “교장이 수감되자 옌칭대학도 청두(成都)로 이전했다.  교수 학생 할 것 없이 교장을 그리워하며 눈시울 붉히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전쟁 승리 후 감옥 문을 나온 스튜어트는 더 이상 우리의 교장이 아니었다. 연말에 한 번씩 옌칭대학을 찾았지만 신분이 미국의 주중대사다 보니 학생들과 편하게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국·공 간에 전운이 감돌 무렵이다 보니 정치 얘기는 꺼낼 엄두도 못 냈다. 트루먼의 특사로 중국에 온 마셜 원수가 대사에 추천했다는 말에 다들 마셜을 욕했다. 여학생들은 특히 심했다. 마셜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새빨개지곤 했다. 옌칭대 졸업생과 재학생 중에는 중공 지하당원들이 유난히 많았다.” 맞는 말이다. 충칭에서 스튜어트를 처음 만난 마오쩌둥도 먼저 머리를 숙였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옌칭대학은 우리의 훌륭한 당원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대사 스튜어트는 공산당과 국민당을 오가며 화해를 종용했다. 여기 가면 이 말 하고, 저기 가선 저 말 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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