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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 추상화가 최욱경, 맥주에 생호박 등 야채 안주 즐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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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2호 26면

예술가의 한끼 

작업실의 최욱경, 1973년. [사진 이명미]

작업실의 최욱경, 1973년. [사진 이명미]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는 ‘여성작가 추상미술전(Women in Abstraction)’이 오는 6일까지 열린다.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 에바 헤세(1936~1970) 등 20세기와 21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여성 작가 110인의 작품 500여 점이 참가하는 이 전시회에 최욱경(1940~1985)의 색채추상 작품 3점이 출품됐다. 전시는 다음달 스페인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에서 순회전으로 이어진다. 최욱경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명성과 작품은 여전히 지구촌의 여기저기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다.

최욱경은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출판사 교학도서(주)를 운영했기에 경제적으로 넉넉했다. 부모는 자식들의 개성과 자유를 존중했다. 최욱경은 그 덕을 크게 봤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망설임과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았다. 최욱경은 열 살 때부터 을지로에 있던 김기창(1913~2001), 박래현(1920~1976) 부부 화가의 화실을 다녔다. 이화여중 때는 김흥수(1919~2014)가, 서울예고 때는 김창열(1929~2021)이 그의 미술 선생님이었다.

1963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갔다. 크랜부룩대학원을 다녔다. 어릴 때부터 국제적 수준의 교양이 몸에 배어 있었던 최욱경은 미국인들과 동등한 시선에서 곧바로 미국 문화에 적응했다. 한국인 화가들이 미국에 가면 현지의 문화를 거부하며 방어적인 한국풍의 화가로 축소되기 쉬운데, 드물게도 최욱경은 미국의 현지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확장시켜 나갔다. 최욱경은 19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 히피문화, 우드스톡 페스티벌, 반전운동 등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온몸으로 다 받아들였다.

관광상품 신라토기도 술잔으로 동원

최욱경의 ‘미완성(무제)’, 캔버스에 아크릴, 128.5x184.5㎝, 1985년. [사진 국제갤러리]

최욱경의 ‘미완성(무제)’, 캔버스에 아크릴, 128.5x184.5㎝, 1985년. [사진 국제갤러리]

그는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살았다. 그중에서도 1976년 로즈웰 미술관의 연구비 수상자로 선정돼 뉴멕시코에서 1년간 지원을 받으며 지낸 아트 레지던스 생활이 인상적이었다. 사막의 황량하고 망망한 자연은 그의 몸과 마음에서 중력의 감각을 뺏어 갔다. 중력에 구애받지 않는 그의 자유로운 색채운용은 그곳 생활의 체험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미국 생활을 하던 화가 최욱경은 1971년 일단 서울에 돌아왔다. 그리고 1974년에 미국으로 되돌아간다. 1979년 본격적으로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택한 도시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도시 대구였다. 영남대가 외지에서 온 교수들에게 제공하는 대구 만촌동의 13평짜리 AID아파트에 최욱경은 터를 잡았다. 1955년 이중섭이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전시를 할 때 그의 은지화 석 점을 구입하여 뉴욕의 MOMA미술관에 기증을 했던 당시의 공보원장 아더 맥타가트도 독신으로 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최욱경은 성격이 깔끔하여 쉽게 사람을 사귀지 못했다. 포장마차에 가서 술을 마실 때도 자신의 나무젓가락과 냅킨을 들고 가는 결벽증이 있었다. 술은 주로 집에서 마셨는데, 가끔은 친구들과 동성로 대구백화점 맞은편 골목 안 막걸리집들을 찾았다. 미국에서 공수해 온 최욱경의 100호쯤 되는 그림이 경상감영 앞의 맥향다방에 걸렸다. 맥향다방은 화랑을 겸했는데 카페의 벽면에 그림들을 바꾸어가며 걸었다. 맥향화랑 대표 김태수(1942~2014)는 최욱경을 존경했다. 술을 사주며 따랐다. 다방의 문을 열면 정면 왼쪽에 가로로 걸린 최욱경의 그림이 나타나며 카페 공간을 압도했다. 갓 볶은 커피 냄새와 이국풍의 그림은 잘 어울렸다. 조선의 선비들이 조심스레 지나다니던 경상감영의 퇴색한 옛길에 중력을 벗어난 최욱경의 추상표현주의의 순도 높은 색채가 찬연한 서양풍의 아우라로 밀려나왔다.

대구 출신으로 홍익대를 다녔던 화가 이명미(1950~ )가 최욱경을 처음 본 것은 1972년 제1회 앙데팡당전이 열린 경복궁에서였다. 몇 년 후 부산의 국제신문 박숙자 기자의 소개로 대구에서 최욱경을 만나 가까워졌다. 자유분방한 색채의 구사라는 공통점을 가진 둘은 곧바로 언니 동생으로 친해졌다. 대구 시절의 최욱경은 제대로 된 작업실이 없었다.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그림을 거의 그리지 못했다. 대신 최욱경은 삶의 순수한 소비에 충실했다. 만촌동 AID아파트에서 자주 파티가 열렸다. 부산에서는 박숙자가 왔다. 서울에서는 한국의 빌리 홀리데이라 불리던 재즈가수 박성연(1943~2020)이 왔다. 이화여대 앞에서 재즈바 야누스를 경영하던 박성연은 틈을 내어 대구 만촌동을 찾아왔다.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즐겨 듣던 최욱경은 박성연이 마냥 좋았다.

짜장면 한 그릇을 포기하는 대신 맥주 두 병을 원할 정도로 최욱경은 맥주 애호가였다. 맥주는 궤짝으로 사서 마셨다. 안주는 생호박 등 간단한 야채를 마요네즈에 찍어 먹는 게 전부였다. 본격적인 요리를 하기엔 공간이 협소했다. 싱크대에 유리 술잔이 가득 쌓였다. 마지막에는 경주의 관광상품인 신라토기도 술잔으로 동원되어야만 했다. 전국에서 모인 개성 강한 문화예술인들로 그의 숙소는 대구 속의 은밀한 히피빌리지가 됐다.

1985년 대구 수화랑에서 열린 ‘이명미 개인전’에 참석한 최욱경(왼쪽 끝). 박성연(왼쪽 넷째), 이명미(왼쪽 여섯째), 박숙자(오른쪽 끝)와 함께했다. [사진 이명미]

1985년 대구 수화랑에서 열린 ‘이명미 개인전’에 참석한 최욱경(왼쪽 끝). 박성연(왼쪽 넷째), 이명미(왼쪽 여섯째), 박숙자(오른쪽 끝)와 함께했다. [사진 이명미]

자고 갈 손님들에게는 잠옷이 지급됐다. 잠옷은 하얀 유도복 상하의였다. 최욱경과 이명미는 유도복 상의에 나염물감 붓질로 그림을 그린 후 뜨거운 다림질을 하여 개성 만점의 잠옷을 완성했다. 그들은 의식을 치르듯 유도복 잠옷을 입고 잤다. 물론 유도복 잠옷은 반납해야 했다. 밤새 술을 마시다 바다가 그리우면 새벽에 갑자기 택시를 타고 부산으로 달렸다. 낙동강 끝 을숙도의 철새도래지도 빠뜨리지 않았다. 중력을 거부하는 새의 가벼운 깃털과 자유로운 움직임은 그녀의 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했다. 거제도 학동에 그들의 베이스 캠프로 쓸 만한 별장을 하나 지었다. 방은 하나, 거실의 테라조 바닥 가운데에 캠프파이어를 피울 둥그런 화로를 팠다. 당시 영남대의 교수 월급은 전국 톱이었다. 왕성한 소비력의 최욱경에겐 그 월급으로도 생활이 부족했다. 부친이 용돈을 보내어 주어야만 했다.

최욱경의 아파트 문을 열면 바로 앞은 정병국(1948~ ), 양행기(1946~ ) 부부 교수의 집이다. 둘 다 서울대 미대 후배들이었다. 최욱경이 이사를 올 때 그의 어머니가 서울에서 따라왔다. 부모의 눈에는 아직 어린 딸로 보였던지 주변에 딸을 부탁하는 인사를 했다. 음악을 크게 틀어 민폐를 끼칠까 걱정이 되었다. 최욱경은 김치가 떨어지면 앞집 문을 두드렸다. 성격도 입맛도 미국식이었던 최욱경이지만 김치는 좋아했다. 미국에 있을 때 김치가 생각나면 그 길로 비행기를 타고 뉴욕 맨해튼 32번가의 코리아타운을 찾아갔다. 설렁탕 한 그릇에 김치를 잔뜩 먹고는 김치를 포장해서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이젠 멀리 갈 것도 없이 앞집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됐다. 가끔 정병국을 그녀들의 파티에 초대하기도 했다.

45세에 돌연 세상 뜨자 밤샘 애도 물결

채 3년이 안 되는 대구 생활을 마치고 1981년 서울 덕성여대로 직장을 옮겼다. 거처와 작업실을 겸한 여의도 시범 아파트는 47평으로 제법 넓었으나 큰 작업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바닥에 비닐을 깔고 작업을 했다. 공간미술관에서 개인전 ‘그림자 놀이’를 하고 난 이후로 점점 우울해져 갔다. 수면제 복용이 늘었다.

최욱경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대구의 이명미가 김포공항에 내려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도착하니 빨려고 물통에 담근 붓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물감이 덜 빠졌는지 아직 물빛이 흐릿했다. 학생들이 몰려들어 며칠간 아파트에서 밤을 새우며 최욱경을 애도했다. 발인날 관이 마당으로 내려오니 후배 화가 이강소와 조각가 심문섭의 슬픈 표정이 육신이 식어 버린 최욱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음 같기도 하고 불 같은 장작 같기도 하고 눈처럼 하늘에서 매일 내려오는 여자’(김영태의 『화산 같은 여자』중) 최욱경은 그렇게 하늘을 향해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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